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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완서 선생님께 드리는 편지
막막할때마다 떠오르던 당신

눈발 속에 제 마음 전합니다


늘 선생님께 편지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인생이 막막하여 그 막막함이 물밀듯이 내 인생을 쓰러트릴 때 본능적으로 누구에게라도 제 감정을 엎지르고 싶은 마음이 북받칠 때 그런 때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왠지 구정물 같은 내 감정이 선생님 앞에서는 왠지 흉허물로 보이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미루고 미루다가 이게 뭡니까. 선생님이 눈을 감으신 오늘, 받을 사람이 세상을 비운 오늘 이 편지를 쓰면서 허탈감과 적막한 막막함이 다시 제게로 밀려오고 있습니다.

무슨 시상식이나 연말 모임에서 잠시 뵙는 것이 전부이고 서로 친근하여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도 아닌, 조금은 먼 거리쯤에 저는 있었지만 어떤 낭패를 보는 때쯤 선생님께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달아오르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혀 먼 사이도 아닙니다. 1983년, 러시아가 개방하기도 전 그 나라 여성시인들이 한국의 여성문인들을 초청하여 갈 때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 여행이 저에겐 아주 당연하고 행운처럼 느껴졌고 여행기간 내내 어떤 만족감이 있었던 것 선생님은 모르셨을 거예요.

가톨릭 모임이나 평화방송에서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님 장례식에서 만나 가톨릭을 선택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 인생에서 어려운 복병을 만났던 괴로운 체험담을 이야기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지나가는 이야기 속에서 저는 선생님의 곧은 정신과 작가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분별이 느껴졌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을 것”이라는 날이 선 정신에 박수를 보내며 사실 선생님을 늘 그리워하고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을 키워왔는지 모릅니다.

꼿꼿한 정신으로 버티시면서도 늘상 소녀 같은 웃음으로 긴장한 상대방을 감싸안았던 선생님은 늦깍이로 등단해 기적적인 많은 작품과 인간의 본심을 꿰뚫는 세상사의 직시는 누구도 해낼 수 없는 함량이었고 무게였습니다.

아직은 하실 일이 많지 않습니까. 제대로 가지 않는 모든 세상의 서툰 물정과 만취상태의 비틀거림 같은 세상의 오류를 어쩌려고 이렇게 빨리 가시는 겁니까. 대신할 수 없는 선생님의 빈자리는 오래 우리를 불안하게 허탈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갔다고 해도 결코 이 아쉬움이 줄어들지 않을 너무나 황급하게 들은 선생님의 마지막을 저는 아직도 실제상황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있다 하더라도 붙잡고 싶은, 더 하실 일이 더 많아서 손 놓을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이기심을 용서하십시오.

천만 번을 생각해도 지금은 때가 아닌 제 아무리 하늘이 우겨도 지금은 아닌 이 황망한 선생님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마치 저희들 남은 사람들의 잘못 같기도 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쓰고 싶은 편지를 하늘 길 열고 있는 눈발 속에 흩날리면서 제 속마음을 전합니다. 다만 사시는 곳을 이동했다고 믿겠습니다. 그렇게 믿겠습니다. 선생님. 보고 싶은 가족을 만나시겠다는 생각으로 이 황당함을 견디겠습니다. 편히 가소서.

글=신달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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