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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와 나의 눈물 ‘박완서표’ 웃음으로 잊다
80세 삶과 문학세계
“6·25없었으면 소설 썼을까”

수많은 작품 자양분 역할


가족문제·아파트 문화 등

소시민 일상 날카롭게 풍자

전세대 아우르며 사랑받아


“한국 문학계의 별이 지다.” “아름다운 미소를 잘 짓던 한 사람은 이제 국화를 받으며 이 세상의 소풍을 끝냈습니다.”

해맑은 미소가 소녀처럼 수줍었던 ‘아름다운 우리의 이웃’ 박완서(80) 씨가 22일 담낭암으로 타계하자 평소 고인을 사랑했던 이들은 안타까워하며 애도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수술 후 치료를 받아왔으나 최근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1931년 개성 외곽인 개풍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의 극진한 사랑과 어머니의 유별난 교육열로 서울로 이사해 숙명여고를 졸업,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신입생이었던 그해 6ㆍ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만다. 의용군에 끌려갔다 총상을 입고 돌아온 오빠의 죽음 등 그의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6ㆍ25 전쟁의 상처는 생의 끝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지만 문학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 작용했다.

그 자신 생전에 “6ㆍ25가 없었으면 소설을 썼을까”라고 말했을 정도로 전쟁의 상처는 1970년 데뷔작 ‘나목’을 비롯 ‘엄마의 말뚝’,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의 자양분이 됐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역에 내리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때는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자신의 상처를 통해 우리에게 위로와 웃음을 선사했던 박완서는 그렇게 내 식으로 귀향하겠다던 꿈을 지니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내가 살아낸 세월은 물론 흔하디흔한 개인사에 속할 터이나 펼쳐보면 무지막지하게 직조되어 들어온 시대의 씨줄 때문에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다”고 실토했다. 그는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선생님이 됐을지도 모른다”며 못 간 길에 대한 아쉬움을 내내 토로하곤 했다.

증언으로서의 그의 전쟁문학은 한 여성이 겪어낸 전쟁의 세밀화, 풍속화라는 점에서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특별하다.

박완서 문학의 매력은 ‘박완서표’라 할 만한 재미다. 나와 내 주위에서 일어날 법한 소시민의 일상을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간 데 있다. 1970, 80년대 산업화와 함께 급속한 변화를 겪은 가족문제, 아파트 문화, 결혼관, 직장 풍속도 등 소소한 일상에 자리 잡은 인간의 욕망, 허위의식을 눙쳐내는 작가의 솜씨는 흉내내기 힘들다. 그런 측면에서 세태소설은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형태이기도 했다. 세태를 슬쩍 비틀어 보여주지만 독하지 않고 웃음을 짓게 만드는 글쓰기는 삶에의 긍정적 태도와 사람에 대한 애정이 바탕이 됐기에 가능했다. 그의 작품은 나와 내 주변 얘기일 수 있는 동질감으로 세대를 불문하고 크게 사랑받았다.

그러나 그의 유머와 웃음 뒤, 개인사는 상처가 많았다. 부친과 오빠를 일찍 잃었고, 대한민국이 88올림픽으로 환호할 때 아들과 남편을 동시에 떠나보내야 했다. 작품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는 가족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단편들이 들어 있다. 그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고통을 독자들과 나누는 일이었고 치유의 행위였기에 공감의 폭이 더 컸다.

마지막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죽음을 예감한 듯 고인은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며 초연해했다. 이제 그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고 끝까지 글을 쓰고 싶다”던 평소 자신의 소망대로 위로와 힘의 영원한 문학으로 남았다.

유족으로는 호원숙(작가), 원순, 원경(서울대 의대 교수), 원균 씨 등 4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5일 오전 8시40분, 장지는 경기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지다. 이윤미 기자/meelee@

사진=김명섭 기자/msi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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