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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엔 딸이 친정부모 제사 지냈다
‘장가간다’는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장인 집에 들어간다’는 이 말은 신랑이 신부 집에 살거나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생활하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는 16세기 조선의 지배적인 풍습이었다.
‘조선의 가족, 천 개의 표정’(너머북스)은 이러한 조선의 생활상을 결혼과 가족을 통해 생생히 담고 있다. 저자인 국사편찬위원회 이순구 편사연구관에 따르면 조선시대는 본디 꽉 막힌 남성중심 사회만은 아니었다.
혼인은 양쪽 집안의 대등한 결합이었기에 여성들은 자신의 성(姓)을 유지할 수 있었고 며느리 못지않게 딸로서의 정체성도 강했다. 이는 제사나 재산분배에서도 드러난다. 17세기만 해도 딸이 친정 부모의 제사를 지내는 게 생뚱한 짓이 아니었으며, 상속법은 아들과 딸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볼 때 “우리나라 여자들은 교만하다”는 정도전의 말은 옛 여성들이 꽤나 알심 있는 존재였음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나아가 신사임당을 봉건적 ‘현모양처’로 한정 짓는 것에도 의문을 던진다. 38년을 친정인 강릉에서 보낸 신사임당은 “며느리보다는 딸로서 훨씬 오래 살았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또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닦아 화가로서 일가를 이뤘으며, 자녀를 위해 자신의 성취를 포기한 인물도 아니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풍습은 중국의 부계 위주 문화가 선진적이라는 인식 탓에 퇴조하고, 17세기 시집살이가 주류가 되면서 조선은 여성들에게 숨 막히는 사회로 변하게 된다.
결국 저자의 핵심은 이렇다. 오늘날까지도 전통을 빌미로 남성 위주의 문화를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역사의 긴 흐름을 살펴보면 결국 “한때의 전통이 다른 시절엔 금기가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려낸 가족에 대한 여러 소묘를 살피다 보면 편견을 깨고 조선시대에 대한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김기훈 기자/ki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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