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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의 거장 오스카 와일드를 파멸로 이끈 사랑

감성의 발달이 남들보다 뛰어난 예술인들은 마음의 격정이 찾아올 때 쉽게 휩쓸리는 경향을 보인다. 예술인들의 사랑이야기가 꽤 오래 회자되는 것도, 사랑의 상대가 여러 명이 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일 것이다. 특히, 천재적인 예술인들은 격정적인 감정에 자신을 놓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행복한 왕자’의 원작자 오스카 와일드가 그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다.


1854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유명한 안과 의사이자 고고학자인 아버지와 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1874년 옥스퍼드에 입학해 문헌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길게 기른 머리와 잔뜩 멋을 부린 옷차림, 그리고 재치 있는 말솜씨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컬트적인 요소는 그의 삶의 철학이었고, 그는 평생 이런 모습으로 일관했다. 이후 런던에서는 그를 두고 극과 극의 평가가 내려졌다. 찬양과 혐오, 이 둘은 오스카 와일드의 수식어이기도 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옥스퍼드 재학 중에 이탈리아의 마을 라벤나를 노래한 시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장한다. 졸업 후에는 재치 있는 말솜씨로 강연을 다니며 작품을 발표하는데, 그의 연극이나 동화는 매번 성공을 거두었다. 1884년 부유한 집안의 콘스턴스 로이드와 결혼하여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오스카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만, 아무도 모르게 미소년들이 있는 술집을 찾았다고 한다. 하룻밤 상대로 어린 소년들을 사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최고 역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발표한 직후, 그는 흠뻑 빠져버릴 한 남자를 만난다.


옥스퍼드의 후배이자, 1870년생인 알프레드 브루스 더글라스 경은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앳되고 잘 생긴 그는 오스카의 마음을 빼앗았고, 오스카는 늘 그를 옆에 두었다. 더글라스가 옆에 있는 동안 오스카는 자신의 최고 작품들을 내놓고 많은 돈을 벌었다. 유미주의인 오스카와 다혈질에 남성적인 더글라스는 서로를 다독이며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던 중 일명, 퀸즈베리 사건이 벌어진다. 퀸즈베리 후작이 오스카를 ‘남색자’라고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이다. 오스카는 뛰어난 작품세계로 이미 높은 지위에 올라 있었고 퀸즈베리의 추문 공개는 매우 타격이 컸다. 이에 오스카는 그를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오스카가 미소년들이 있는 술집을 다닌 것은 사실이었고, 더글라스와의 관계 또한 공개적이었다. 친구들은 모든 것이 불리할 것이라며 오스카를 말렸다. 그러나 단 한 명, 더글라스는 오스카의 명성이 실추되도록 재판관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오스카를 부추겼다. 연인의 말에 용기를 얻은 오스카는 재판을 진행시킨다.


재판 결과, 오스카는 참패했다. 진실을 뒤집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스카는 2년 징역형을 받았고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다. 그의 작품은 출간 금지되고 자녀들에 대한 후견인 자격도 박탈되었다. 그의 친구들이 오스카를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오스카는 감옥으로 향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 때 ,오스카에게 재판을 하라며 용기를 준 더글라스는 어디에서 뭐하고 있었을까. 탄원을 위해 동분서주 뛰고 있었을까. 더글라스는 이미 프랑스로 이민을 떠나버린 후였다. 옥살이를 하며 오스카는 ‘옥중기’라는 글을 써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두고 떠나버린 더글라스를 용서할 수 없었고, 이 일에 책임을 지라며 비난했지만 더글라스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석방된 오스카는 국적이 박탈되어 프랑스로 떠나야 했다. 그곳에서 더글라스를 만났지만 둘은 사랑을 지속시킬 수 없었다. 열정적인 사랑이 식은 후, 일마저 할 수 없었던 오스카는 가난한 삶을 살아야했고 수감생활 중에 얻은 지병으로 4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더글라스는 오스카가 죽자, 영국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살았다. 오스카와의 사랑은 물론, 그의 죽음을 끝까지 외면하던 더글라스는 노년이 되어서야 오스카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사랑에 솔직하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한 사람을 파멸시켰다. 그가 사랑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사랑에 대한 다수의 시선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천재적인 예술인을 조금 일찍 잃어야 했다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도움말 LJ비뇨기과 장수연 원장


헤럴드 생생뉴스/onli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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