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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울린 고전 '인간의 조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들을 사랑해야"

<인간의 조건>(지식공작소.2005)은 다음 질문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은 끝났어도 결국, 답은 각자가 풀어가야할 숙제로 남겨진 듯하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역사와 실존 사이에서, 우정과 애정 사이에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감각과 의지 사이에서, 밤과 낮 사이에서,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에서 인간이 인간이 되는 최소 조건은 무엇인가?’ (작품 해설 중)

그를 찬양할 수 있는 어휘가 부족하다. 어쩌면 먼발치에서 지레 겁먹어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거인’으로 보이기도 하다. ‘20대 청년기에 벌써 프랑스 망명 중인 트로츠키와 이데올로기와 예술에 관해 거침없이 논쟁,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도 수세에 몰렸다.’는 신화, 해박하고 날카로운 한편, 아무도 따를 수 없이 날쌘 사고의 속도! (번역자 김붕구).

그에 대한 헌사는 찬탄을 넘어 외경에 가깝다. 말로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이렇다.

“나는 이 책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유일한 것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위대함에 관한 여러 가지 이미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원들-억눌리고, 암살당하고, 산 채로 불 속에 던져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파괴되어 간 더 많은 사람들, 내 삶에서 만났던 그 사람들의 바로 이러한 죽음을 위해서 이 글을 썼습니다. 열정이 존재하는 곳, 위대함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갈망.

그러나 이러한 열정과 위대함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정열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이 책에서 멀어져 갈 것입니다. 이 책은 그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니까요.” (1933년 콩쿠르상 수상연설에서)

이 글에 유난히 작가에 대한 인용이 많은 이유는 이 책만큼 그의 전기적 사실과 부합되는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1927년 3월 21일 밤 0시 30분. ‘모기장을 쳐들어 볼까? 아니면 모기장 그대로 찌를까.’,‘암살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인다는 행위만은 아니다......’ 그는 양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오른 손에는 접은 면도칼을, 왼손에는 짤막한 단도를 쥔 채 망설이고 있었다.‘(8~9쪽)

중국인 테러리스트이며, 이데올로기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철저한 혁명가 첸. 그가 처음으로 테러대상을 보며 어떻게 죽일지 망설이는 장면이다. 생각보다 사람을 죽인다는 게 그리 큰 일이 아님을 알게된 그는 살인 이후, 이미 세상은 그가 알던 곳이 아님을 깨닫는다. 동시에 세상과 유리되어 떠다니게 된다. 이후 죽을 때까지 그를 삼켜버린 언어는 ‘고독’이었다. 고독하고 고독하다. 어떻게 해도 결국 고독이 정답임을 깨닫는 일이 그의 신음이자, 고백이며, 살아있는 이유이다.

다른 인물 기요, 전 베이징대학 교수인 프랑스인 지조르와 일본인 여자 사이의 혼혈아. 첸과 함께 폭동의 조직자로 활약한다. 마침내는 인터내셔널과 자기의 이념과의 차이에 환멸을 느끼고 고민하다, 청산가리로 자살한다. 지조르는 기요와 다른 인물들의 중심이자, 지혜로운 조언자기도 하다.

또 한 사람 키토프. 러시아인으로, 상하이 폭동의 조직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죽음을 기다리다가 기요의 자살에서 고독을 느끼는 동시에 일종의 휴식을 구한다. 자신의 자살용으로 쓰려던 청산가리를 동료 중국인에게 주고 불에 타 죽을 각오를 한다.

이는 첸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조국을 떠나거나, 국적의식이 상실되고, 일정한 사회에 뿌리박지 않고 떠다니게 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정상적인 가정이나 부부관계조차 가지지 않는, 따라서 자연스런 일체의 연줄을 끊어버린 고립된 인간군이라는 점이다. 혁명과 사상 또한 인간의 본질을 답보해줄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존재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다시 시작해야 함을 알려주는 일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여자들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동거. 정부(情婦). 매음관계로 나오는 세 가지 형태 모두 심한 왜곡을 경험한다. 부유하며 도도한 사내 페랄은 그 못지않은 여자 발레리의 이용대상이 되지 않나 의심한다. 그의 의심은 발레리를 생물학적으로 굴복시켰다는 증거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페랄은 발레리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식을 확인하기 위해 스텐드 불을 켜 놓는다. 그런 그가 불편해 자꾸 꺼버리는 발레리를 저지하기 위해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는 행위같은 것이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명석하게 알고 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만을 소유한다.”자신이 느끼는 쾌감은 알겠지만 그녀는 어떤가. 나에게 집중하고 있는가. 그는 그녀의 생물학적인 반응은 솔직할 거라 여긴다. 정사의 순간마져도 집중할 수 없게 하는 자의식과 타인에 대한 미심쩍음이 한편 슬프기도 하다.

또 다른 관계는 함께 있지만 동상이몽이거나, 자아중심의 욕망 채우기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 또한 뭐가 뭔지 질문하는 과정 속에 있다.(454~459쪽)

이는 말로의 이혼, 또 다른 여성과의 편력을 설명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여인들과의 불화’는 그의 성장배경과, 성격적 특징을 나타낸다(그를 키웠던 여인들, 그를 키우려 했던 연상의 아내에 대한 반발을 유추해본다). 역으로 남자들과의 관계는 안정적이며, 굳건한 신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혁명과정에서 배신에 맞먹을 만한 행동을 한 동료에게도, 상대방을 암살하지 못한 실패에도 그들은 근본적인 신뢰를 흩트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텨주고 있는 것이다.

지조르 노인은 모스크바로 가는 메이(기요의 아내)와 헤어지며 이렇게 말한다.

“메이, 내 말을 잘 들어라.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들을 사랑해야 돼.”

죽은 사람을 비롯, 모든 죽어있는 ‘것’들은 견고하다. 무덤 속에 들어간 천재, 지식이 박제된 책, 검증받은 예술작품, 확고해보이는 진리, 맹목적인 종교... 이들은 살아있는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나약하며, 왜곡되고, 그래서 슬픈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몽매한 살아있는 인간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하라는 지조르의 말이 얼마나 눈물겹고 아름다운 부탁인지 알 것 같다.  한가지. '왜 울었나'에 답하자. 너무 어려워서 울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어서 한 달 가웃 책을 들었다 놨다 했다.

[북데일리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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