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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 포럼 - 박종구> 왜 唐太宗 李世民인가?
부흥보다 애민정책 우선…반대세력도 과감히 포용
틀을 깬 인재영입 등…지도자 덕목·의무 일깨워


12월 대선을 앞두고 향후 5년간 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의 자질과 조건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다.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국가지도자의 자질로 정치적 판단력, 정서적 안정감, 개인적 시련, 그리고 국가에의 헌신을 들었다. 그런 점에서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평가받는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이세민인가? 태종 이세민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의 남북 대립, 수양제(隋煬帝)의 폭정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슬기롭게 극복해 대당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국가지도자의 모범으로 꼽힌다. 그는 민본(民本), 실용(實用), 통합(統合), 인재(人才)를 핵심 국정철학으로 삼아 후대의 모범이 되는 정관성세(貞觀盛世)를 구현했다.

그는 시종일관 확고한 민본정책을 추구했다. 애민(愛民)을 치국의 근간으로 삼고 국민을 ‘섬기는’ 정부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다음으로 토지가 귀하며, 군주는 가장 나중이다’는 맹자의 말씀을 적극 실천했다. 특히 수나라가 물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굶주림으로써 민심이반을 초래해 망했다는 냉엄한 현실인식하에 백성을 살찌우고 편안하게 하려는 애민정책을 견지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만인의 천하’이며, 국가부흥보다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이세민은 실용주의 정책으로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구현했다. 허례를 멀리하고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에 중점을 뒀으며, 백성을 아끼고 작은 정부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공자의 말처럼 정치란 재물을 아끼는 데 있다는 실용주의를 실천했다. 허영을 버리고 실속을 취하는 실사구시 정신, 지나친 환락을 경계하는 절제의 미덕을 보여줬다. 종실세력을 축소하고 궁녀를 해방하고 주현을 합병하는 등 예산절감시책을 추진했다.

통합의 정치도 추구했다.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대립된 반대세력을 과감히 포용했다. 특히 형 이건성의 참모였던 위징을 재기용한 것은 정관성세를 가져온 결정적 성공요소가 아닐 수 없다. ‘여러 말을 들으면 맑게 되고 한쪽 말만 들으면 어둡게 된다’는 위징의 주장처럼 신하의 직언을 적극 수용해 군신일체론을 실천했다. 종전의 무력 중시, 패권주의에서 왕도정치로 과감히 전환해 선정의 기틀을 마련한 점, 친인척 배제, 비(非)한족 등용 등 폐쇄적 인사관행을 탈피한 점, 개방적 진취적 세계국가를 지향한 점 등은 그가 ‘덧셈의 정치’를 위해 온몸을 던졌음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는 거대한 인재대국(人才大國)을 건설했다. 적조차도 과감히 포용하는 개방적 인사를 실시해 인재의 틀을 대폭 확대했다. 위지경덕, 위징, 왕규 등 인재를 과감히 아웃소싱해 국정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배려했다. “쓰면 눈에 가득 인재요, 버리면 땅에 가득 쓰레기다”며, 적극적 인재영입에 나섰다. 특히 신하의 간언을 중시해 언로를 활짝 열었다. 간관의 유니크한 역할이 이 시대만큼 강조된 적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리한 고구려 원정 실패, 후계자 선정의 혼란, 서역점령의 후유증 등 그도 인간이기에 여러 가지 실정(失政)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백성과 인재를 지극히 사랑하고 실사구시적 국정운영을 통해 태평성대를 추구한 그의 노력은 시공을 초월해 지도자의 덕목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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