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말맛·제스처 등 코믹 연기 볼만
빌딩 숲속의 서울 도심 한복판. 짙은 색 정장 차림의 한 여자가 또각또각 경쾌한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있는 힘껏 내달린다. 그 뒤를 뒤쫓는 카메라 든 기자들. 그런데 이상하다. 유심히 보니 이 여자, 과연 여자가 맞나 싶다. 떡 벌어진 어깨, 다리를 벌리고 뛰는 품새, 그리고 가발을 고정하기 위해 망사를 씌워 핀으로 고정시킨 짧은 머리.
오는 31일 개봉하는 김한결 감독의 신작 영화 ‘파일럿’의 첫 장면이다. 누가 봐도 사연 있어 보이는 스크린 속 그는 ‘여장 남자’로 돌아온 배우 조정석(44·사진). 뮤지컬 ‘헤드윅’에서 트랜스젠더 로커의 파란만장한 삶을 풀어내면서 수없이 여장을 했던 그가 다시 긴 속눈썹을 붙였다.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하는 순간 제 몸짓이 바뀌더라고요. 구두를 신으면 걸음걸이도 자연스럽게 (여자처럼) 되는 것 같았어요.”
사실 그에게 여장은 생경한 그 무엇은 아니었다. ‘헤드윅’ 공연을 하면서 경험이 꽤 많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송파구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조정석도 “적응이 쉽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과장된 여장이 필요한 ‘헤드윅’가 달리 이번엔 평범한 여성으로 분해야 했던 그.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단기간 체중을 7㎏ 감량하고, 갸름한 턱선을 위해 꾸준히 지압을 받았다. 거울 앞에서 섰을 땐 여성의 표정과 제스처를 연습했다. 조정석의 연기가 자연스러웠던 것은 바로 그의 이같은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파일럿’은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해고된 남자 조종사 한정우(조정석 분)가 여동생의 신분으로 변신해 재취업에 성공하는 내용을 다룬 코미디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해 한국 최고의 항공사 기장으로 자리매김했한 한정우. 준수한 외모에 다재다능한 끼까지 겸비한 그는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31만 명이 넘는 그는 소위 ‘나 잘난 맛에 사는’ 나르시시즘 그 자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술자리에서 여성 조종사에게 한 성차별적 발언 때문에 회사에서 해고된다. 항공사 재취업을 시도하지만, 신상이 모두 까발려져 그 어떤 회사도 그를 채용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철없는 남편에게 정이 뚝 떨어져 버린 아내는 끝내 이혼을 통보한다. 한정우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여정은 이토록 빠른 호흡으로 전개된다.
그런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한정우가 마주친 사자성어,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이를 수 없다). “그냥 하세요.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 저스트 두 잇(Just do it).” 뷰티 유튜버인 여동생 한정미(한선화 분)이 방송에서 한 말이 술에 잔뜩 취한 한정우의 귓가에 자꾸 맴돈다. 그렇게 그는 여동생 이름으로 항공사 입사에 재도전 한다. 그야말로 ‘미쳐서’ 말이다.
사건의 전개가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여장이 익숙지 않는 한정우가 마주하는 상황들이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짓게 한다. 이 과정에서 조정석의 트레이드 마크인 ‘미워도 밉지 않은’ 특유의 자연스러운 말맛과 자연스럽게 몸을 쓰는 기술이 캐릭터에 숨을 불어 넣는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는 ‘쩍벌’ 자세가 고쳐지지 않아 민망한 듯 움츠리는 제스처나 급한 마음에 남자 화장실로 직행하다 무안해진 감정을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숨기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110분. 12세 관람가.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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