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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주단태(엄기준)가 설렁탕을 먹고 있다. [SBS 캡처] |
술에 절어 해장국을 시켜만 먹다가 어느 날 집에서 소고기뭇국을 직접 끓여봤습니다. 그 맛에 반해 요리에 눈을 떴습니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지만 나를 위해 한 끼 제대로 차려먹으면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한 끼에 만 원이 훌쩍 넘는 식비에 이왕이면 집밥을 해먹어야겠다 결심이 섰습니다. 퇴근 후 ‘집밥러’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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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79번째 광복절을 맞았습니다. 지난해 광복절에는 대통령실에서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초청해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밥상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밥상에 오른 메뉴 중 하나는 설렁탕이었습니다. 설렁탕이 흔한 서민 음식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의 밥상에 오른 건 아닙니다.
일제는 설렁탕 한 그릇을 두고 독립운동가들을 회유하기도, 고문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장로교의 대표로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남강 이승훈 선생은 설렁탕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는 장의자에 강제로 묶여 고춧가루를 탄 설렁탕 국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는 고초를 겪었다고 알려져 있죠.
이후에도 ‘설렁탕 취조’ 기법은 수사기관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았습니다. 범죄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테이블 하나를 두고 기싸움을 벌이던 수사관과 피의자가 설렁탕 한 그릇으로 둘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장면이 꼭 등장합니다. 숨 막히는 신문이 이어지다 수사관은 담배 한 대를 건네며 알루미늄 쟁반을 내옵니다. 쟁반에는 깍두기와 뚝배기 설렁탕 한 그릇이 놓여있습니다. 설렁탕 한 그릇을 먹던 피의자는 결국 입을 떼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인기 드라마였던 ‘수사반장’에서 묘사된 설렁탕 취조는 2021년 드라마 ‘펜트하우스’에까지 등장합니다.
사실 ‘설렁탕 취조’의 오리지널 버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오야코동입니다. 오야코동은 닭고기와 계란물을 익혀 밥 위에 얹어 먹는 일본식 ‘덮밥’입니다. 이번 퇴근 후 부엌에서는 일본의 국민음식 오야코동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와 취조 음식에 대한 사연을 들려드립니다. 집에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오야코동 조리법도 소개합니다.
[음식 썰]
오야꼬동의 뜻을 풀면 ‘오야’는 부모(親) ‘코’는 자식(子) ‘동’은 덮밥입니다. 한마디로 ‘부모 자식 덮밥’이죠. 재료로 사용된 닭고기와 달걀을 부모와 자식으로 빗댄 말로, 알고 보면 섬뜩한 작명입니다. 일본의 가정식으로 사랑받는 원래 오야코동은 ‘후식 볶음밥’ 같은 메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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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오야코동은 1800년대 후반 도쿄의 한 닭요리 전문점 ‘타마히데’에서 개발됐습니다. 원래 이곳에서는 간장, 미림 설탕 등으로 간을 하고 끓여놓은 ‘와리시타’라는 양념국물에 태국에서 들여온 싸움닭을 넣고 끓인 나베 요리를 팔았습니다. 그러다 몇몇 손님들이 먹다 남은 나베에 흰 쌀밥을 붓고 계란과 섞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샤브샤브를 먹고 계란·밥을 넣고 후식 죽을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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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닭고기 나베. |
이 모습을 유심히 본 타마히데의 5대 주인의 아내가 신메뉴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1891년 타마히데의 셰프가 ‘닭고기와 달걀을 푼 수프를 밥 위에 얹어 먹는 돈부리’를 개발해냅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재료를 밥 위에 얹어 먹는 돈부리는 익숙한 식문화였습니다. 돈(돈부리)이란 원래 그릇을 부르던 말입니다. 지금도 그릇을 의미할 때가 있지만, 그 그릇 위에 밥을 담고 반찬을 올려 먹는 덮밥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런 형태의 음식은 14세기경 무로마치 시대(1336년~1573년)에 밥 위에 다섯 가지 반찬을 올려 먹던 ‘호항’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돈부리는 사찰에서 특히 즐겨 먹었는데, 고기류 반찬 대신 채소를 썰어 간을 한 뒤 국물을 끼얹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후 에도 시대에는 무사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유행하면서 돈부리가 대표적인 식사 유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숟가락 없이도 큰 그릇에 담긴 밥과 국물, 재료를 후루룩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죠. 그런데 타마히데는 원래 닭고기 나베를 풀코스 식사로 제공하는 전통 식당이었기 때문에 오야코동을 배달 메뉴로만 팔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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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코동 [게티이미지뱅크] |
‘오야코동’에서 비롯된 일본의 음식 작명 센스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닭고기 대신 소고기 또는 돼지고기를 넣으면 달걀과 고기는 서로 ‘타인’이라는 의미에서 ‘타닌동(타인 덮밥)’이라고 부릅니다. 또 닭고기 대신에 오리고기를 사용하면 '이코동', 즉 사촌 덮밥이 됩니다. 이름 덕에 오야코동은 ‘부모와 자식 사이’를 비유하는 일본 대표 가정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국민음식으로 사랑받던 오야코동은 1930년대에 정치범을 회유하는 수사 기법으로 활용되며 오명을 씁니다. 1982년 쓰루미 슌스케 도쿄대 교수는 그의 저서 ‘전시기일본의 정신사 1931~1945년’에 이렇게 밝힙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턴(회유)’이라는 단어는 공안법에 따라 설립된 사상경찰에 의해 채택됐다. (중략) 사상 경찰은 급진적인 대학생들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며 이러한 ‘회유’를 지원하는 기술에 대한 매뉴얼을 출판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비롯한 모든 민족의 자치'와 '일본의 침략 정책 반대'를 골자로 한 사상운동이 확산했습니다. 이에 당국은 사상경찰제도를 도입, 정치범들의 회유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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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그 매뉴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찰서장은 구치소에 체포된 사상범을 서장실로 불러 서장 집무실 의자에 앉힙니다. 그리곤 오야코동 한 그릇을 사준다고 합니다. 피의자가 허겁지겁 식사를 할 때 수사관은 절대로 정치적인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오야코동 한 그릇을 다 비울 때쯤 그저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할텐데”라고 툭 한마디 뱉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턴 인덕션 매뉴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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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왜 굳이 오야코동이냐 의아하겠지만 오야코동이야말로 이름에서부터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입니다. 또 정치범의 범죄행위로 하여금 부모님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을 줄 수도 있겠습니다.
이 매뉴얼은 1936년 일본의 이데올로기 검사와 형사국장을 역임한 이케다 카츠가 발간한 ‘좌익범죄에 관한 각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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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코동. [게티이미지뱅크] |
오야코동 수사 기법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서 ‘설렁탕 수사 기법’으로 현지화 됩니다. 따끈한 쌀밥에 고기 국물을 제공, 취조당하는 이의 마음을 흔든 것이죠. 따끈한 국물을 맛보면 순간적으로 마음이 풀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오야코동 수사 기법은 반세기가 지나서도 일본 드라마의 ‘클리셰’로 등장합니다. 한국 경찰 취조실에서 설렁탕을 먹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야코동은 재료만 있으면 집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일식 요리 중 하나입니다. 다른 반찬도 필요 없습니다. 이 때문인지 일본에서도 오야코동은 자취생 기본 요리로 손꼽힙니다. 만들기도 쉬워 실패할 걱정도 없습니다.
▶ 재료: 닭다리살 또는 닭가슴살 200g, 계란 2개, 밥 한 공기, 양파 1/2, 파, 진간장, 미림, 설탕(또는 알룰로오스), 혼다시
1. 양파를 채 썰고 닭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줍니다. 닭고기는 껍질 부분이 밑으로 가게 해 자릅니다.
2. 계란 2개를 풀고 양념을 만듭니다.
양념은 진간장 2큰술, 미림 2큰술, 혼다시 약간, 물 30ml, 설탕 2큰술을 넣고 섞습니다.
3. 중불로 달궈진 프라이팬에 닭고기를 껍질 부분부터 올려 익힌 뒤 양파를 넣습니다.
노릇노릇하게 익으면 양념과 계란물을 붓고 1분간 더 익힙니다.
나베에서 유래된 음식이어서 그런지 현지인 레시피는 육수를 먼저 끓이고 닭고기를 넣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기름이 많은 닭다리살을 사용할 때, 고기를 먼저 구워 닭기름을 충분히 내준 뒤 육수를 부으면 좀 더 맛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joo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