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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대밭에서 왕대가 나온다’ [헤경이 만난 사람-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어려운 사람 오면 뭐든 줘서 보내”
빈부차 초월 상생 가치관 집안내력
옛글자 새긴 한글 티셔츠 제작·판매
우리 정체성·사회책임·바른 삶 실천
1년 절반은 해외 생산기지 현장경영
반세기만에 세계일류 의류기업 도약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이 경남 창녕 고택 뒤 왕대밭을 걷고 있다. 어려서부터 창녕을 자주 찾았다는 성 회장은 요즘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본인이 복원해온 창녕석리성씨고가 (昌寧石里成氏古家)를 찾는다. 강형원

‘왕대밭에서 왕대가 나온다’고 했다. 훌륭한 인물이 나오기 위해서는 훌륭한 가정 환경과 교육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27세에 창업해 연매출 4조원대의 글로벌 의류제조판매 업체로 성장한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77세)의 고택을 찾았을 때 든 첫인상이다. 서울 태생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의 고조부 때부터 정착한 경남 창녕은 우리나라에서 양파를 처음 재배했던 양파 시배지다.

파, 마늘을 즐겨먹는 우리 식단을 완성시키는 양파 재배의 성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서해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동아시아 모든 지역에서는 “파와 마늘이 음식에 들어간다”고 화교2세 서학보 요리사는 말한다. 동아시아 내륙지방으로 갈수록 생강을 더 많이 먹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조상들의 터전인 창녕을 자주 찾았다는 성기학 회장은 요즘도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본인이 복원해온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55호 창녕석리성씨고가 (昌寧石里成氏古家)를 찾는다.

성씨 고택 한옥에서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정체성이 피부로 느껴진다.

친환경적인 소재로 조립하고 분해해서 이동할 수 있는 한옥은 한번 지어서 쓰다가 버리는 콘크리트 건물과는 달리 우리 민족의 친환경 주택건축 방법이다.

창녕 석리 성씨 고가에 모여있는 한옥들은, 조선 후기부터 성씨 일가가 살다가 6·25전쟁 때 일부 소실된 한옥을 재건하고 전국 각처에서 사라지는 한옥을 수집해서 재활용한 고택이다.

성기학 회장이 복원하고 4대째 지켜온 경남 창녕 고택은 안산(案山)인 화왕산(火旺山)의 장엄한 능선이 고택을 안전하게 감싸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도 편안하고 넉넉해 보인다. 강형원

최근에는 60명도 넘게 찾아온 손님들 모두 재워줄 수 있을 만큼 큰 한옥 단지가 됐다. 안산(案山)인 화왕산(火旺山)의 장엄한 능선이 고택을 안전하게 감싸고 있어 풍수지리적으로도 편안하고 넉넉해 보인다.

한옥에서 대화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20세기까지 우리말에서 쓰던 순경음 발음으로 대화가 흘러간다.

“우리 할머니께서는 순경음을 쓰셨어”라고 성 회장은 회상한다.

1912년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한글 말살 정책이 있었다. 1912년 4월에 공표한 보통학교용언문철자법대요(普通學校用諺文綴字法大要)에서 서울지역 말을 표준말로 정하면서 아래아(·)를 폐지하고 변화된 한국말에 맞추어,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 발표한 한글 맞춤법에서는 기본자를 24자(자음 14, 모음 10)로 단순화 했다.

한글 맞춤법에서 버린 4 글자: 자음 옛이응, 여린히읗, 반시옷, 모음 아래아 이외에도, 우리 표준말 음운에 없다고 생각해서 버린 순경음 자음 4개, 순경음 비읍 , 순경음 미음 ㅱ, 순경음 쌍비읍 ㅹ, 순경음 피흡 ㆄ 이 있으며, 반설경음(ㄹㅇ)이 있다.

놀랍게도 순경음과 반설경음에는 한국말에 흔하지 않은 영어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예를 들어 순경음 비읍(ㅸ) 은 영어 발음에 있는 v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 20세기에 없어진 훈민정음의 표기법을 112년 만에 다시금 깨어나게(reboot)했다.

지난 주 10월 9일 한글날, 세종시에서 열린 한글런(run) 달리기 대회에서 노스페이스가 만든 한글 티셔츠를 5000명 참가자들이 입고 뛰었다. 달리기 대회 신청을 하지 않은 이들도 나와서 총 7000여명이 한글 경험을 했다.

지난 10월 9일 한글날, 세종시에서 열린 한글런(run) 달리기 대회에서 노스페이스가 만든 한글 티셔츠를 5000명 참가자들이 입고 뛰었다. 20세기에 없어진 훈민정음의 표기법을 112년 만에 다시금 깨어나게(reboot) 했다. 강형원

기업을 이끈다는 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생물학적인 도전이다.

영원무역 창업주 성기학 회장은 안목이 탁월하다. 우리 국민들 누구나 한번쯤은 입어보거나 들어봤을 아웃도어의 대표주자 노스페이스의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은 창업 이후 지난 50년간 회사를 세계적인 의류 기업으로 키워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영원무역은 외국기업들과 경쟁해왔다. 다른 한국기업들이 중간 브로커를 거쳐서 세계 시장에 진출할 때, 그는 현지 직원을 앞세워 직접 시장을 뚫었다. 그 결과는 오늘날 전 세계 의류업계의 주목받는 플레이어(big player)로 자리잡았다.

영원무역 미국인 직원 미셸은 “성 회장은 매우 총명하신 사업가(Chairman Sung is a smart businessman)”라고 말한다. 현지 시장 전문가를 직원으로 상주시키며, 빠짐없이 여러 북미 기업들의 사업 팽창 초창기 때부터 유명 브랜드로 자리잡힐 때까지, 그 성장과정을 함께 하고, 이끈 선견지명이 있는 기업지도자(visionary business leader)다.

끈기와 인내심이 강한 성기학 회장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굿 리스너(good listener)’인 셈이다.

“소통의 달인은 경청을 잘하는사람 (Good conversationalist is a good listener)”이라는 생각은 필자가 배웠던 미국기업 지도자 교육에서는 꼭 나오는 말이다.

필자가 옆에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는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의 생각을 성실하게 듣는 소통 철학을 갖고 있다. 그것은 결코 어떤 떠도는 생각도 놓치지 않는, 항상 깨어있는 배움의 자세다.

기업환경에서 능력자는 바로 ‘문제해결을 잘 하는 사람(problem solver)’이기도 하다.

문제해결을 잘 하는 직원이 있으려면 적절하고, 필요한, 현명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리더가 전제되어야 한다.

현명한 문제제기 능력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인공지능(AI)의 사용에서 기본이자, 성공 비결이다.

그는 직관이라고 할 수 있는 생물학적인 느낌이 탁월하다. 시장의 흐름, 변화하는 정세, 예상 가능한 다가올 변화, 이 모든 느낌을 기업경영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 타고난 기업인(natural businessman)이다.

“개성공단을 시작할 때부터 나 역시 초대 받았지만 선택하지 않았습니다.”성 회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대부분의 생산지가 외국에 있는 영원무역의 인프라는 다중적인 감리(multiple oversight) 없이는 생산능률을 보장 못한다. 성 회장이 일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의 생산 기지에서 보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기학 회장은 4대째 지켜온 경남 창녕 고택에서 “옛날에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꼭 뭐든지 줘서 보낸 우리 집안 내력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강형원

영원무역의 성장비결은 단연코 현장 경영이다. 그에게 전화를 하면 절반은 비행 중에 위성폰으로 전화를 받는다.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행동하는 기업 리더다.

방글라데시를 비롯해 전 세계 각지에 엄청난 규모의 공장을 두고 있으며 수시로 현장을 방문해 경영 지시를 하는가 하면 당면한 문제를 즉석에서 풀기도 한다.

그의 성공법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현장 경영과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순발력이다. 창업 이래 몇번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전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성품과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대든 진지하게 대하는 기품이 있다.

“옛날에 어려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꼭 뭐든지 줘서 보낸 우리 집안 내력이 있었다”고 성회장은 회상한다. 빈부의 격차를 초월한 상생의 가치관을 집안에서 보고 자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노스페이스의 한글 티셔츠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한글에 대한 소중함을 알리고자 성회장과 필자가 의기투합한 결과다.

그를 두번째 만났을 때 훈민정음을 취재하면서 알게 된 우리의 옛글자로 티셔츠를 만들어 소개했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흔쾌히 노스페이스에서 제작 판매하기로 약속했다.

출시된 노스페이스의 한글 티셔츠는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도 특히 인기가 많다고 매장 직원은 말한다. 지금은 한류에 힘입어 명동의 본사 매장에서 효자상품이 됐다. 한글날을 맞아서 다양한 글씨로 모자와 가방도 선보였다.

우리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윤대(輪對)라는 단어가 숱하게 많이 나온다. 윤대는 임금이 신하들을 돌림 차례에 따라 만나 보고 국사에 대한 의견을 듣는 일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 전체 2685번 윤대 기록 중에 가장 많은 기록은 세종대왕의 윤대 기록 1159번이다. 다른 어떤 조선의 왕보다 똑똑한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경청한 세종대왕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것은 말할 나위없는 진리다.

이상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인들의 성공에는 소외계층의 존재를 잊지 않고 챙겨주는 정신이 포함돼 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시대마다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향해서 바른 삶을 실천한 현인들이 많았다.

왕대는 왕대밭에서 나온다.

글·사진=강형원 포토저널리스트

moo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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