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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도전과 태정태세 그토록 개혁 외쳤지만….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고려말 사대부의 중심인 목은 이색은 ‘합리주의에 기반한 귀족정치’를 꾀했으나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해 과도한 법 적용 등 정치적 술수도 마다하지 않았고, 위화도 회군 이후 실권자로 우뚝 선 이성계ㆍ방원 부자(父子)-정도전은 ‘(고려) 왕권 존중’이라는 허울을 서서히 벗고 왕조 교체를 염두에 둔 힘의 정치를 시도한다. 그러나 ‘힘의 정치’는 정도전이 꿈꾸는 시스템이 아니다.

이들 각 자가 추구하는 이상과 현실적 전략은 늘 어긋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때문이었을까. 고려말 사대부 중 체제수호 세력과 왕조교체 세력, 이성계 일가의 지향점은 늘 원하던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측근에 관대한 권위적 정권의 원칙 파기 그후...= 새 왕조를 연 이성계는 공신 중심의 통치를 하다보니 금방 한계를 노출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사력에 기대 완력으로 정권을 얻은 뒤엔 근세 유럽식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내각책임제를 지향했으나 뜻이 변질되면서 결국 ‘1%를 위한 사회’로 귀결됐다. 이방원의 강력한 왕권 중심체제는 공론을 무시하고 측근의 전횡을 방치하는 ‘원칙의 상처’를 빚고 말았다.

조금 더 뜯어보면, 정도전식 정치시스템은 귀족 합의체였다. 왕의 군권과 신흥귀족 사대부의 명분 및 네트워크가 결합된 모습이다. 정치자금은 명문세도가가 병역면제 조건으로 소작농에게서 받던 탈법적 토지임대료를 국가가 받도록하는 과전법으로 조달하려 했다.

이에 비해 이방원은 고려말 혼란상이 왕권 약화에 있었다고 보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꾀하면서 신흥공신과 측근들을 중심으로 자기의 뜻이 상명하달되기 바랬다. 내 사람을 만드는데엔 돈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측근들의 뇌물 비리에 관대했다.

▶태종-세종, 대를 이은 ‘조선최대 비리 몸통 봐주기’= 이방원이 우려곡절 끝에 등극하던 1401년, 서른한살의 생원 조말생이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다. 이 수재는 왕의 측근으로 기용되며 승승장구한다. 세종으로의 정권이양기에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를 맡던 조말생은 그러나, 당대 최대 권력형 비리의 몸통이 된다.

조말생이 챙긴 뇌물은 노비 48명, 땅 4결(약 100만㎡), 은병 수천근 등 800관에 달했다. 당시 양형기준은 80관 이상이면 사형이었지만 세종은 “선대왕(태종 이방원)부터 헌신한 공신으로서 그 공로를 잊을 수 없다”면서 귀양을 보내는데 그쳤다. 조말생은 2년만에 다시 귀경한 뒤 동지중추원사, 함길도관찰사로 부활한다.

▶권문세가 너도나도 비리혐의, 물고 물리는 고변= 성군이던 세종도 의리에 약해 원칙을 어겼고, 뇌물사건은 귀족에서부터, 지방관,중인,포졸 등 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사라질 줄 몰랐다. 선대의 업보일수도 있겠지만, 세종조차 척결하지 못한 조선의 뇌물관행은 2014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한 뇌물 고변, 자신의 죄를 벗기 위한 거짓 뇌골고변도 있었다. 형조판서 이승손이 여러왕에 걸쳐 측근노릇을 하던 권맹손의 고변때문에 ‘소 10마리를 뇌물로 받은 혐의’로 파직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절치부심하던 이승손이 권맹손의 매관매직을 고변해 권을 낙마시킨뒤 예조판서로 복귀했다. X묻은 개는 너나 할 것 없었다. 대형 기업비리가 터지면 어김없이 수십~수백명 단위의 ‘정관계 리스트’가 나도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목도한다.

▶목민은 참사 지원 금품마저 빼돌리고...= 윗물이 흐리니 아랫물도 흐렸다. 황해도 기근으로 아사자가 발생해 양곡 500섬을 보내자 안악군수는 300섬만 백성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를 빼돌렸다. 국가적 참사의 희생자 또는 불우이웃을 위한 성금 마저 착복한 것이다. 2013년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장교들은 마구잡이 징집통지를 해놓고는 빼주는 조건으로 뇌물을 받아챙겨 축재를 했다. 그래서 상당수의 병영에선 어린 도령과 나이든 노약자의 비중이 군졸의 절반에 육박하기도 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10여년전 대한민국에서도 ‘병풍’사건이 발생해 대통령선거판을 두 번이나 흔들기도 했다.

▶장교는 징집 면제대가로, 포졸은 곤장 살살치는 대가로 뇌물 수수= 포졸들은 곤장을 살살치는 대가로, 통금 시간 위반을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고, 죄인들의 집단탈주를 허락하며 거액을 챙겼다가 임금을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역관은 외국상인의 체류기관 연장, 조기 귀화 절차 완료 등을 미끼로 돈을 받았다고 실록은 전한다. 조선 초기 사헌부 재판관 노한은 피고인이 적반하장으로 자신의 뇌물수수설을 유포하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었고, 누명은 벗었으나 스스로 사직하고 말았다. 사회적 법질서가 깨진 곳에는 온갖 무정부적 작태가 독버섯 처럼 퍼져나간 것이다.

원칙과 매뉴얼이 무너진 곳에는 반드시 탐욕과 금권이 판을 쳤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원칙을 지키는 일은 나라 발전을 위해, 대참사를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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