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아내를 취한 자에겐 자식이 없으리니….’
왕비인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했던 게 못마땅했던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원래 자신의 형인 아서왕의 아내였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레위기 20장을 바탕으로 작성된 헨리 8세의 이혼 서류는 지금도 바티칸 비밀문서 보관실에 잘 보관돼 있죠. 스페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여장부 이사벨라 1세의 막내 공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헨리 8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캐서린은 춥고 어두운 수도원에 감금돼 외로이 말년을 보내다 죽게 됩니다.
여섯 명의 왕비를 둔 잉글랜드의 절대 군주 헨리 8세(1491-1547). 그의 이야기는 역사인가 싶으면 소설 같고, 소설인가 싶으면 역사 같다. |
그런데 말입니다. 캐서린은 어쩌면 목이 잘린 채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잉글랜드 성공회를 만든 장본인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기의 스캔들 주인공이기도 했던 헨리 8세(1491-1547). 그의 여섯 명의 왕비들 가운데 두 명은 목이 잘려 죽고, 두 명은 이혼을 당하고, 두 명은 의문의 병으로 죽습니다. 헨리 7세의 왕위를 계승 받은 형 아서왕이 갑자기 죽고, 봉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헨리 8세에게는 마음먹은 대로 이 여자 저 여자를 취할 수 있는 세상이 찾아왔던 겁니다. 188cm 장신으로 미남형인데다가 바람둥이 기질까지 있던 헨리 8세가 권력까지 쥐게 되면서 본색을 더욱 드러내게 된 거죠.
다시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 캐서린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지금까지만 보면 헨리 8세가 왜 형의 아내를 굳이 자신의 아내로 취했는지 궁금증이 생기셨을 분들이 있을 겁니다. 헨리 8세가 형의 아내를 데려온 건 기세등등한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좌측)과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우측). 캐서린은 여러 번의 유산 끝에 딸 메리를, 앤 불린은 딸 엘리자베스를 낳는다. 아들을 원한 헨리 8세는 매번 다른 여인을 찾았다. |
당시 스페인은 남부에 있던 이슬람 국가와의 전쟁 끝에 그들을 몰아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시켰을 뿐 아니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막대한 금은보화가 유입되던 시기였습니다. “아서왕과 결혼은 했지만 잠자리는 가지지 않았다”는 캐서린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캐서린은 아서왕의 동생 헨리 8세와 재혼을 할 수 있다는 교황의 특별 허가를 받게 됩니다.
헨리 8세도 젊고 아름답기까지 했던 캐서린이 싫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년 동안 캐서린이 수차례 사산하고, 또 태어나더라도 병에 걸려 한 달 만에 자녀들이 세상을 떠나자 헨리 8세의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하죠. 캐서린은 10번도 넘게 임신을 했었지만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는 훗날 ‘피의 여왕’이라 불리는 딸 메리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남자가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점점 늙어가는 아내에게 싫증이 나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헨리 8세에게 아내와 갈라질 만한 구실을 알려준 여성이 있었으니 추후 그의 두 번째 왕비가 된 앤 불린입니다. 앤 불린은 앨리슨 위어의 소설 ‘헨리 8세의 후예들’과 영화 ‘천일의 스캔들’에서 꽤 비중있게 다뤄진 인물 가운데 한 명인데,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캐서린의 시녀였습니다. 1520년 앤 불린의 도움을 받아 성경의 레위기 20장 구절을 근거로 하는 이혼 서류를 로마 교황청에 보낸 헨리 8세. 하지만 오히려 헨리 8세는 자신을 파문시킨다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서신을 받게 됩니다.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이모였던 캐서린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거든요.
화가 난 헨리 8세는 국교를 가톨릭에서 잉글랜드 성공회로 바꿉니다.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습니다. 한 여자에 대한 군주의 욕정이 국교를 바꿔버리는 사태로 이어진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치정 스캔들이 역사를 바꿨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 걸까요.
물론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는 교회 개혁의 계기가 됐지만 본질적인 원인은 아니었을 겁니다. 성공회로 바꿀 수 있었던 건 교회 개혁에 대한 시대정신이 있었고 국민의 열망이 바탕이 돼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되면서 잉글랜드 교회의 영토와 재산이 오로지 헨리 8세의 수중으로 들어오는 경제적인 부분도 간과할 수 없겠죠.
잉글랜드의 대법관이자 정치가였던 토마스 모어. 변호사였지만 이내 수도사가 된 그는 국왕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1504년 하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부지사와 대법관이 된다. 그러나 가톨릭 신앙을 고수하면서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해 결국 처형을 당한다. |
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헨리 8세. 그의 반 가톨릭 정책은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에게 탄압을 가하는 결과로 귀속됩니다. 로체스터의 주교 존 피셔와 헨리 8세의 전직 대법관이자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도 이때 처형되죠. 헨리 8세와 세 번째 아내 제인 시무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에드워드 6세 때 만들어진 ‘42개 조문’은 엘리자베스 여왕 때 ‘39개 조문’으로 개조돼 오늘날까지도 잉글랜드 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되고 있답니다.
훗날 왕위에 오르는 헨리 8세와 첫 번째 왕비 캐서린의 딸 메리 1세. 그녀는 한 맺힌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가톨릭을 복원합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신교도들이 처참하게 처형되는데 역사는 그녀를 ‘피의 메리’라고 부르게 됩니다.
(*) 여기까지가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인 캐서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그에게는 여섯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했었죠? 헨리 8세가 사랑에 빠져든 앤 불린은 어쩌다가 헨리 8세에게 목이 베이는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요. 내일 자(25일) [바람난세계사]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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