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좌측)과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우측). 앤 불린은 여러 번의 유산 끝에 딸 엘리자베스를, 제인 시모어는 아들 에드워드를 낳는다. |
“이제부터 나의 사랑은 당신에게만 바쳐질 것이오. 아름다운 단어로 채워진 당신의 편지는 너무나 진실했고 나로 하여금 존경하고, 사랑하며, 섬기도록 만들었오.”
첫 번째 부인의 시녀였던 앤 불린에게 푹 빠진 헨리 8세. 그가 쓴 편지를 보면 앤 불린을 향한 헨리의 무한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잉글랜드 국교회를 선언하고 더 이상 교황청의 이혼 허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던 헨리 8세는 첫 번째 부인 캐서린과의 결혼이 무효였음을 발표하고 1533년, 통통 튀는 매력의 소유자 앤 불린과의 결혼에 성공합니다. 이로 인해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공주는 서녀로 강등돼 버리죠.
헨리 8세는 첫 번째 부인 캐서린에게서 보지 못한 앤 불린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여성들과는 달리 고동색 머리카락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앤 불린의 우아함과 요염함에 넋을 잃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린 그해,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엘리자베스가 태어납니다. 이 엘리자베스가 훗날 ‘처녀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헨리 8세, 참 변덕이 심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8세의 콩깍지가 벗겨지기 시작하거든요. 앤 불린이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처럼 끝까지 사내아이를 낳지 못하자, 헨리 8세의 마음이 차갑게 식는 건 한 순간이었습니다. 앤 불린은 수차례 유산했고 또 태어나더라도 아기들이 병에 걸려 금방 죽어버리죠. 이를 지켜본 헨리 8세는 ‘어떻게 앤 불린과 헤어질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하게 됩니다. 앤 불린과 재혼하기 위해 한 나라의 국교까지 뒤집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왕이 헨리 8세가 맞을까 싶을 정도죠.
왕의 마음을 읽은 앤 불린의 정적들은 때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앤 불린과 정반대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얌전하고 수더분한 숙녀, 제인 시모어를 앞세워 헨리 8세를 유혹합니다. 제인 시모어는 앤 불린의 불린 가문과 라이벌 관계인 시모어 가문 출신입니다.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선 결혼해 줘야 한다”며 조건을 내건 제인 시모어. 헨리 8세는 즉각 앤 불린 제거 작업에 착수합니다. 이쯤 되면 헨리 8세가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 타입의 남성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헨리 8세는 앤 불린에게 반역, 간통, 근친상간 죄를 뒤집어 씌우고 앤 불린을 런던탑으로 데리고 갑니다. 앤 불린이 왕비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입니다. 특히 “아이를 갖기 위해 앤 불린이 친오빠인 조지 불린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앤 불린 올케의 주장이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1536년, ‘천 일의 앤’이라 불린 앤 불린의 생은 비참하게 마감됩니다. 앤 불린의 처형으로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도 메리 공주와 마찬가지로 서녀로 강등됩니다. 지금도 그녀가 처형된 5월 19일이 되면 런던탑에서 한 맺힌 앤 불린의 유령이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앤 불린에 대한 남아있는 기록도 달랑 런던탑 최후의 17일 뿐이죠.
제인 시모어가 목숨을 맞바꿔 낳은 에드워드 6세. 하지만 에드워드 6세는 재위한 지 6년 만에 16살의 나이로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
앤 불린이 런던탑에서 참수되던 그날, 얄밉게도 헨리 8세의 세 번째 아내인 새 신부 제인 시모어는 대부분의 시간을 웨딩드레스를 준비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앤 불린의 피가 마르기도 전에 약혼식을 올렸고 1537년 10월 12일 새벽 2시, 드디어 제인 시모어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가 훗날의 에드워드 6세입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그리도 기다리던 아들을 낳고도 제인 시모어는 제대로 된 찬사도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목숨을 바쳐 낳은 애드워드를 남기고 제인 시모어는 산후병으로 12일 만에 사망합니다.
(*) 제인 시모어의 묘비명은 ‘여기 불사조가 잠들어 있으니 그 죽음으로 또 다른 불사조가 생명을 얻었도다’라는 라틴어 문구입니다. 이후로도 세 차례 더 결혼한 헨리 8세. 그의 유언은 제인 시모어 옆에 묻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의 묏자리에 함께 묻힌 유일한 왕비입니다. 헨리의 네 번째 부인부터 여섯 번째 부인까지의 이야기는 [바람난세계사] 27일 자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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