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실물의 느낌이 꽤 다른 경우에 소위 ‘포토샵에 속았다’고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에도 실물과 딴판인 ‘초상화’가 소개팅용 사진으로 대신 쓰이기도 했답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찾던 헨리 8세도 초상화에 속았다고(?) 하니까요. 그 초상화에 누가 있었냐고요? 헨리 8세의 네 번째 아내가 될 앤이 있었습니다.
(좌측) 헨리 8세의 네 번째 부인 클레페의 앤. (중앙)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부인 캐서린 하워드. (우측)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부인 캐서린 파아. |
헨리 8세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아들을 낳고 산후병으로 12일 만에 사망한 그의 세 번째 아내 제인 시모어. 이내 헨리 8세는 자신의 네 번째 부인을 찾는데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총신 토머스 크롬웰이 독일 클리브즈 공국의 왕 누이인 앤 공주를 추천합니다. 한스 홀베인이 그린 앤의 초상화가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있는 헨리 8세에게 건네지죠.
“이 여자와 결혼하겠소!”
단아하고 청순가련해 보이는 앤의 모습에 반한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 헨리 8세는 별 고민 없이 앤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하지만 앤을 직접 본 헨리 8세는 이내 실망해버립니다. 헨리 8세가 앤을 두고 ‘추녀’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걸 보면 초상화에 담긴 앤의 모습과 실물의 느낌이 꽤 달랐나 봅니다.
그러나 이미 엎어진 물. 이 둘의 결혼에는 신교 국가인 클리브스 공국과 성공회를 지지하는 잉글랜드가 힘을 합쳐 가톨릭에 대항하려는 정략적 의도도 깔려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헨리 8세는 반년 만에 왕비의 어린 시녀였던 캐서린 하워즈에게 눈을 돌리고, 네 번째 부인 앤에게 사실상 이혼을 강요하죠. 자기 손으로 처형시킨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의 외사촌이기도 했던 캐서린 하워즈는 당시 19살이었습니다.
이쯤에서 <바람둥이王 헨리 8세와…여섯아내> 편을 잠깐 상기시켜 봅시다. 헨리 8세는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 성경의 레위기 20장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렇다면 캐서린 하워즈를 다섯 번째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던 헨리 8세가 이번엔 어떤 주장을 펼쳤을까요. 네,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헨리 8세는 ‘앤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으니까 이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합니다.
제법 눈치가 빨랐던 걸까요, 두 번째 부인처럼 목이 잘려 죽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앤은 헨리 8세의 이혼 요구에 순순히 따르고 그 덕분에 앤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습니다.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의 소유였던 리치먼드 성과 헤버 성까지 하사받기도 하고요. 다만 앤을 추천했던 헨리 8세의 오른팔 크롬웰은 런던탑에서 비참하게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크롬웰의 죄목은 ‘반역’이었습니다.
헨리 8세의 오른팔이었던 총독 크롬웰. 그는 헨리 8세를 아끼는 마음에 클레페의 앤과의 결혼을 추진하지만 오히려 반역 혐의로 목이 베이게 된다. |
1540년 7월 28일 자신의 총신 크롬웰을 처형시킨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하지만, 이내 그는 캐서린 하워드가 자신의 근위대장이자 시종인 토머스 쿨페퍼와 외도를 하고 결혼 전에도 여러 남자들과(심지어 조카와도)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분노합니다. 30살 가까이 나이가 많은 헨리 8세를 사랑하기에는 10대였던 캐서린 하워드가 너무 어렸던 걸까요. 아무튼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앤 불린처럼 캐서린 하워드는 런던탑에서 끔찍하게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1년 반 뒤에 헨리 8세는 두 딸의 가정교사이자 과부였던 캐서린 파아와 여섯 번째 결혼식을 올립니다. 박학다식하고 학식이 높았던 그녀는 헨리 8세의 세 자녀인 메리와 엘리자베스 공주, 에드워드 왕자를 모아 가정다운 가정을 만들어 주려고 애를 썼죠. 다만 늙고 병든 헨리 8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캐서린 파아는 헨리 8세의 부인이라기 보다 간호사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결혼 4년 만에 헨리 8세는 55세의 나이로 스캔들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훗날 사랑하는 남자와 재혼한 캐서린 파아는 35세의 나이에 산욕열로 죽게 됩니다.
(*) <바람둥이王 헨리 8세와…여섯아내> <사랑의 폭군 ‘헨리 8세’…역사를 비틀다> <헨리 8세의 로맨스는 계속된다> 기사를 다 읽었다면 이제 상상해 봅시다.
여러분은 영국의 베르사이유란 별명을 가진 햄프튼 코트의 정원에 앉아있습니다. 188cm의 큰 키를 가진 헨리 8세가 사냥을 마치고 당당하게 걷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인 캐서린과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배를 자랑스레 내밀며 점성술사에게 아기의 성별을 알아내라고 다그칩니다. 세 번째 부인인 제인 시모어가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침대에 누워서 에드워드 왕자를 낳은 뒤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골골대는 헨리 8세를 간호하는 여섯 번째 부인 캐서린 파아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힙니다.
자, 또 어떤 그림이 머릿 속에 그려지시나요.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