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론자 정조 “천지가 내린 풀”
온 백성 흡연자로 만들겠다 선언
곰방대 문 기생의 모습은 유혹의 상징
담뱃불 핑계로 불륜도 심심찮게 벌어져
일제때 장죽 사라지며 종이담배 등장
국채보상운동 일환으로 금연운동 확산
“남초(南草)는 사람들에게 유익하오. 무더울 때에는 더위를 씻어주어 기가 저절로 내려가므로 더위가 절로 물러가오. 추울 때에는 추위를 막아주어 침이 저절로 따뜻해지므로 추위가 절로 가신다오. 밥을 먹을 때에는 그 도움을 받아 음식이 소화되고 변을 볼 때는 악취를 물리치오. 잠이 오지 않을 때 담배를 피우면 잠이 온다오.”
지극한 담배사랑이 엿보이는 담배예찬이다. 이 언술의 주인공은 바로 정조대왕이다. 애연가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담배를 재배해 신하들에게 하사하기까지 했고, 심지어 초계문신에게 시 창작을 시험할 때도 흡연을 이용했다. 승지 한 명에게 담배를 한 대 피우라 하고 다 피우기 전까지 시 한 수를 지어내도록 하는 시험이다. 빠르게 시를 짓는 천재적 능력을 가리자는 것이었는데 이 시험에 합격한 이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
정조는 담배를 통해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애민정책을 꾀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모든 백성에게 담배를 피우게 할 것인지 대책’을 제시하라고 규장각 초계문신들에게 문제를 낸 것이다. 문제에 해당하는 ‘남령초 책문’에는 정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담배가 해롭다고 비난하는 사대부들의 ‘속된 견해’를 반박하는 내용이 길게 들어있다. 인간을 사랑하는 천지가 내린 풀이 담배이고 모든 백성을 흡연자로 만들겠다는 정조의 선언이 참으로 흥미롭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쓴 ‘담바고 문화사’(문학동네)는 조선을 사로잡은 담배의 이모저모를 인문학적으로 살폈다.
담배는 정조의 예처럼 무엇보다 의학적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순조의 셋째딸 덕온공주가 유방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자 친모인 순원왕후가 공주를 궁에 들어오게 해 담배침을 유방의 종기에 발라 치료했다는 편지가 전한다.
애연가들이 말하는 담배의 즐거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기분을 바꿔주고 산만함을 집중하게 해주는가하면 대화의 연결고리가 됐다. 흡연이란 행위 자체가 하나의 멋이었으며 담배는 심지어 ‘내면의 벗’으로 까지 여겨졌다.
‘담배 전문가’랄 이옥의 ‘연경’ 권4에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일곱가지 장면이 나온다. 그 첫째가 밥 한 사발 배불리 먹은 뒤에 마늘 냄새, 비린내가 남아 있을 때 한 대의 효용이다. 여기에 더해 이옥은 별도로 담배가 ‘땡기는’ 특별한 순간을 집었다. 그는 조정에서 회의하느라 흡연을 참다가 대궐문을 벗어나자마자 서둘러 한 대 피우자 오장육부가 모두 향기롭다고 썼다. 달빛 아래, 비 내릴 때, 잠에서 막 깬 아침 창가, 늦가을 주막집 밤 등 담배가 그리운 순간을 이옥은 살뜰하게 기록했다.
담배는 유혹의 수단이기도 했다. 예쁜 여인이 임 앞에서 애교를 떨며 담배를 피우는 흡연의 멋을 ‘염격(艶格)’이라 했다. 특히 기생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유혹의 상징으로 굳어졌고, 담뱃불을 빌린다는 핑계로 불륜이 시작되기도 했다.
담배는 경제적인 이득을 보장하면서 더욱 시끄러운 기호품이 됐다. 청나라 동북부 지방의 거대한 담배시장에서 흡연자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은 조선에서 수입해간 담배였다. 담배에 중독된 청나라 귀족들은 조선산 최고급품 지사미(품질 좋은 잘게 썬 담배)를 요구했다. 그만큼 이득이 보장돼 곤궁한 선비들도 담배농사에 매달렸다. 특히 명청 교체기 전란 시국에서 담배는 조선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으로 포로로 끌려간 수많은 이들의 몸값을 지불한 것도 담배였다.
담배에도 명품은 따로 있었다. ‘재물보’의 저자 이만영의 시에는 진안초와 삼등초가 천하에 견줄만한 상대가 없는 질 좋은 담배로 묘사돼 있다. 전라도 진안에서 생산되는 진안초와 평안도 삼등 지역에서 생산되는 삼등초는 조선후기 300여년 동안 최상의 담배로 군림했다. 세금은 늘 골치거리였다. 구한말 정부에서 연초세를 징수하기 전까지 담배의 생산과 유통에서 공식적으로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 담배를 재배하는 농토에 농지세가 부과되고 연초의 판매 독점권을 가진 한양의 시전 연초전과 철초전이 국역을 차등있게 부담하는 것이 일종의 준조세에 해당할 뿐이었다. 서유구는 담배에 세금을 매기지 않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재정고갈의 원인으로 꼽았다.
융성했던 전통담배문화는 일제의 강제 합병으로 급격히 빛을 잃는다. 장죽의 소멸이 대표적. 일제는 장죽으로 담배 피우는 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규정하고 지연권(종이에 만 담배)을 들여왔다. 일본 무라이제 히로라는 권연초가 널리 보급되면서 장죽에 꾹꾹 담뱃잎을 담아 여유롭게 피우던 담배의 풍경화는 사라져 갔다. 일제강점기에는 위정척사파의 금연운동이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확산되고 외국산 담배가 국내시장을 장악해가면서 금연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책은 흡연의 광풍이 몰아친 조선 후기 300년 동안 담배가 피워낸 새로운 풍경과 생활의 변화 등을 한데 모아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