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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김필수]‘속성(速成)’ vs‘숙성(熟成)’
점 하나로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말들이 있다. ‘속성(速成)’과 ‘숙성(熟成)’도 그 중 하나다. ‘급하게’와 ‘느리게’, 그리고 ‘미완성’과 ‘완성’의 대조다.

얼마 전 재미있는 외신기사가 났다. 인터파셀(interparcel)이라는 영국 인터넷 업체가 ‘인내심’과 관련해 2000명에게 물었다. “얼마나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수 있나?”

‘웹 로딩 10초, 동영상 재생 16초, 식당에서 어린아이 고성 참기 10분, 지하철 대기 13분, 약속에 늦는 연인 기다리기 17분, 전화 회신 대기 18분, 주문음식 대기 24분, 그리고 남자들에게 가장 길게 느껴질, 저녁외출 때 치장하는 아내 기다리기 27분...’

영국이라 그런지 한국보다 너그럽다. 한국이라면 반 토막은 내야 할 것 같다. 남미로 여행 간 한국인들이 식당에 가 주문을 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빨리 빨리”를 외쳤다. ‘한국인’ 주방장이 바로 튀어 나와 볼멘 소리를 한다. “그 소리 듣기 싫어 지구 반대편으로 왔는데, 여기까지 와서도 그 소리를 들어야겠느냐”고.

서울미술관을 운영하는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의 말이다. “그림을 1주일 만에 그리면 팔리기까지 2~3년이 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림 한 점에 2~3년을 투자하면 2~3일 만에 팔릴 수도 있다” 속성이 갖는 폐해, 숙성이 주는 장점이다.

이상규 K옥션 대표는 판화 찍듯 속성으로 만들어지는 미술품에 대해 한 걱정을 했다. “보다 빠르고 수월하게 미술품을 접할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래 숙성된 본질가치를 느껴 볼 기회를 상실하는 건 어쩔 건가”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은 경영과 발레를 병행하며 분투중이다. 이제 막 취임 1년(올 2월)이 지났다. 벌써부터 성과 논쟁이 불거진다. 때가 일러도 한참 이르다. 강 단장은 “5년은 넘어야 제 색깔을 낼 수 있다”며 우물에서 숭늉 찾는 조급함을 경계했다.

강신장 모네상스 대표의 비유는 재미있다. 이른바 ‘고속도로 문화’와 ‘국도 문화’다. 가족여행에 나선 강대표는 코스를 이렇게 잡았다. ‘동해에서부터 전라도까지, 대각선으로, 국도로만’. 고속도로로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세상.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요약하면 이런 대비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vs. 손 닿을 듯 눈에 들어오는 산과 하늘’, ‘앞만 보고 달리는 vs. 좌우앞뒤를 보면서 때로는 멈출 수 있는’, ‘깔끔하지만 북적이는 (휴게실) vs. 한적하고 정감 어린 (구멍가게)’

소중한 것들을 천천히 돌아보지 못한 것 같아 후회스러웠다고 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데 대한 회한도 있었다고 했다. 한국이 ‘고속도로 문화’에 접어든 건 이미 오래 전이다. 필자만 봐도 그렇다. 국도로 장거리 여행을 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들은 늘 핀잔이다. “아빠는 운전만 하면 엄청 서두르고, 입도 거칠어진다”고.

너무 서둘러서, 너무 급해서 놓치는 소중한 것들이 분명 있다.

시인 고은은 단 세 줄 짜리 시( ‘그 꽃’)로 죽비를 내리친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 그 꽃”

pils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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