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역사의 민낯-승정원일기9]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하승현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하승현


성균관(成均館)의 유생들은 공부만 했을까? 성균관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자격을 갖춘 사람이나 고위 관료의 자제나 특별 전형을 거친 자가 입학하는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하지만 성균관 유생들은 학문을 닦고 연마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 사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수 있었다.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라고 여겨 임금이나 대신도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생원 정유(鄭楺) 등 수백 명이 신축년(1721, 경종1)에 연잉군(延礽君, 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세울 때 반대한 자들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725년(영조 1) 6월 11일, 영조는 입직한 승지를 만나는 자리에서 상소를 올린 우두머리인 정유를 불렀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역적을 토벌하기를 청한 것은 옳다고 하면서도 상소 내용 가운데 부적절한 부분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답변하는 과정에서 정유는 임금의 심기를 건드렸다. 영조는 책이 넘어가지 않도록 눌러두는 서진(書鎭)으로 책상을 내리치고 소장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신하들이 영조를 진정시킨다.

홍석보:사람의 감정 가운데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노여움입니다. 임금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으니, 진실로 너그럽게 용서해야지 이와 같이 기를 꺾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성균관 유생의 상소는 다른 유생의 상소와는 차이가 있는데, 어찌 이렇게 하신단 말입니까. 국조 300년 이래로 일찍이 성균관 유생의 상소를 비답 없이 도로 내려준 일이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영조에게 노여움을 진정시킬 것을 청하고, 유생의 기개를 꺾어서는 안된다며 임금을 설득한다. 임금 앞에서 뜻을 굽히지 않는 유생의 모습, 격노한 임금 앞에서도 눈치를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유생을 보호하려는 신하들의 모습 등이 기록을 통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