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인은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으로 재조명되기 전까지 무려 350여 년 간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서양 최초의 여성화가입니다. 이 화가의 작품은 미술 교과서 책장 한 귀퉁이에도 나오지 않지만, 17세기 초기 바로크 시대에는 이탈리아와 영국 전반에 걸쳐 그녀의 명성이 높았습니다. 카라바조, 루벤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대가와 함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593년 7월 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아르테미시아가 태어났습니다. 로마 최고의 화가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그녀는 미술에 관한 재능을 보였지만 당시 여성들이 전문적인 기관에서 미술수업을 받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대신 아버지가 그녀를 가르쳤습니다.
아르테미시아가 20대 초반에 그린 자화상, 루트 연주자로서의 자화상. |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딸의 재능을 더 키워주고 싶었던 아버지는 원근법의 대가로 꼽히는 동료 화가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딸의 개인 교습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믿었던 타시가 당시 18살이던 아르테미시아를 수차례나 강간합니다. 분노한 아버지가 타시를 고소했고 아르테미시아는 법정 증언대에 서게 됐죠. 페미니즘 역사에서 꼽는 ‘세기의 소송’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장장 7개월에 걸친 소송이 진행될수록 어째 진실과는 상관없이 스캔들의 주인공은 아르테미시아였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멸시를 받는 쪽은 타시가 아닌 그녀였던 겁니다. 위증을 막는다는 이유로 손가락 고문까지 받아야 했던 사람도 그녀였습니다. 모진 고문에도 같은 말을 한다면 그건 진실일 것이라고 시각에서였죠.
사실 청원서도 찬찬히 보면,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도 딸 보다 자신의 피해를 더 내세웁니다. 처녀의 순결은 가문의 명예가 걸린 문제인데 타시가 자신을 죽인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래서 고소인도 아르테미시아가 아닌 그녀의 아버지가 됩니다.
더욱이 타시는 아르테미시아가 원래 처녀가 아니었고 자신과의 관계를 즐겼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아르테미시아가 먼저 자신을 유혹했다고도 하고요. 어떻게든 죄를 면하고 싶었던 타시가 만들어낸 이야기였으니, 참 뻔뻔한 거죠. 타시에게 건넨 그림 제작비 선금을 받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했던 손님들은 타시가 무죄로 풀리도록 남몰래 손을 쓰기도 했습니다. 재판은 그녀에게 불리했습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습니다. 타시가 아내 살인을 모의하고, 내연 관계에 있던 처제와 다른 화가의 그림을 훔치려고 했고, 또 과거 여자 형제를 성폭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타시는 유죄를 선고받죠. 다만 처벌은 가벼웠습니다. 1년 형입니다. 오히려 이 소송으로 유명세를 탄 타시에게는 일감이 밀려드는 판국이었습니다.
모략과 수모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승리로 이끌어낸 아르테미시아. 오히려 그녀는 화가로서의 미래를 포기해야 할 지경에 놓입니다. 그러나 역사 이야기가 늘 그렇듯이 그녀의 삶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죠. 아버지가 급한 대로 결혼을 시켰지만 아르테미시아는 곧 남편과 헤어진 뒤 타향을 떠돌며 화가의 길을 걷습니다. 먹구름처럼 따라다니는 비난에도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실력 하나로 승부하기로 작정하죠. 그래서 작품을 주문한 고객에게 그녀가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답니다.
“내 그림에서 카이사르의 용기를 가진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그림이 그만한 가치가 없으면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 결혼과 이별의 20대를 보낸 뒤 이탈리아 전역을 전전하며 천재 화가로 명성을 드높이던 아르테미시아. 그녀는 23세 때 여성 최초로 피렌체의 권위 있는 미술 단체인 아카데미아 델디세뇨 직업 화가 신분으로 가입하게 됩니다. 메디치가의 주문을 받는 영국 궁정화가로도 명예를 한 몸에 안았죠. 다만 그녀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그녀의 어릴 적 겪었던 사연이 반영된 걸까요. 아르테미시아의 작품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다른 남성 화가들이 그린 유디트는 전혀 다릅니다. 당시 유디트는 선정적이고 가녀린 소녀로 묘사되는데 아르테미시아의 손을 거치면서 남성 적장을 제압하고 목을 자르는 여성으로 재탄생하거든요. 특히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강간한 남자를 그려놓고 유디트의 모습에 자신의 심정을 담아낸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작품 속 유디트의 태연한 표정과 억센 두 팔은 남성에 대한 잔혹한 복수극이 아니라 차라리 평화에 가까워 보입니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611~1612년경.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남성을 능가하는 떡 벌어진 어깨, 굵은 팔뚝, 찌푸린 이마 등 힘세고 강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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