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부터 3박4일 간의 일정으로 제주에서 진행됐던 제44회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 급변하는 기업 경영 환경 속에서 저명인사의 강연을 통해 기업인들에게 ‘통찰과 힐링’을 주고자 매년 개최되는 행사다. 대한상의 회장을 비롯해 전국 상의 회장단이 한자리에 모이고, 회원사의 최고경영자나 임원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기업인의 대형 이벤트다.
기업인들의 행사니 만큼 주된 화두도 정부의 경제정책, 대내외 경영환경 등으로 집중된다. 자연스레 올해 제주포럼의 최대 화두는 한·일관계였다. 지난 17일 포럼 개막 전 이뤄진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과의 기자간담회에서도 질문 대부분이 일본 이슈로 모아졌다. 간담회 도중 박 회장이 국내 현안에 대한 질문도 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박 회장은 이날 “지금은 최선을 다해 대통령이 대처하도록 도와야 할 때라고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제를 달았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차이가 있을 수 있고 입장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박 회장은 현 갈등에 대해서는 “경제보복이라거나 경제전쟁이라는 단어는 조금 맞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외교적 사안에 대해 경제적 수단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 같다”고 정의했다.
박 회장의 이날 발언에는 기업인으로서의 신중함이 짙게 배어났다. 내부에서 의견차이와 입장차이를 계속 표출시켜 해결되면 좋지만, 내부 갈등으로는 해결은 커녕 오히려 상대방에 이용당하게 마련이라는 판단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었다. 경제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결국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전쟁’의 속성을 피하고 상대에게 퇴로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속내였다. 하지만 이런 신중함은 청와대 민정수석의 선명한 편가르기에 퇴색됐다. 조국 민정수석은 전체의 맥락이 아닌 ‘최선을 다해 대통령을 도와야할 때’라는 문구에 천착했다. 그리고 박 회장이 굳이 피하고자 했던 전쟁의 단어를 남발했다.
조 수석은 이날 페이스북에서 “대한민국의 의사와 무관하게 경제전쟁이 발발했다”며 “문재인 대통령은 경제 전쟁의 ‘최고 통수권자’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조 수석은 이어 “전쟁 속에서도 협상은 진행되기 마련이고 가능하면 빠른 시간 종전을 해야 한다”며 “그러나 전쟁은 전쟁이다”고 했다. 조 수석은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左)’냐 ‘우(右)’냐가 아닌 ‘애국’이냐 ‘이적(利敵)’이냐”라고 일갈했다. 박 회장에 대해 ‘존경’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한 조 수석이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적인 표현은 정작 견해 차이와 입장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박 회장의 전제를 무시한 것과 다름 없다.
참석자들의 청와대와 정부에 대한 실망감은 경제 컨트롤타워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강연 후에도 터져나왔다. 홍 부총리는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 대한 일방적인 전달과 해명에 급급했다. 일련의 경제 활력 저하와 불확실성에 대한 위기감과 절박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정경제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에 대한 강요만이 있었다는 게 참석자들의 일관된 평이다.
홍 부총리는 “기업 생태계의 공기 같은 공정경제의 바탕 위에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더해 혁신적 포용성장으로 (한국 경제의)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면서 “지속가능 성장을 위해 정부와 민간, 수출과 내수, 성장과 분배 등 균형 성장을 이뤄가는 쪽으로 바꾸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 참석자는 “실망이었다. 다른 세상에 사시는 분 같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홍 부총리의 강연 다음날 한국은행은 올해 성장률 목표치를 2.2%로 하향조정하며,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인하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기준금리 인하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향후 상황이 확대될 경우 경제에 끼칠 영향에 대한 우려도 표출했다.
지난 21일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 연립여당은 전체 의석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며 무난히 승리했다. 비록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 의석은 확보하지 못해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한·일 갈등을 주도하고 있는 아베 총리의 영향력은 건재할 것이 분명하다. 상황은 이처럼 악화일로다. 보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 볼 수 있는 솔직함과 냉철함이 필요하다. 제주포럼에서 나타난 정부 관계자들의 안일한 현실 인식과 일방적인 정부 코드 맞추기는 암울함 만을 더한다. “이제 제발 정치가 경제를 놓아주어야 할 때 아니냐”던 박 회장의 한탄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