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영면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국내 기업사에서 가장 짦은 기간에 가장 큰 성장을 이뤄낸 기업인이다. 그리고 대우는 국내 기업사에서 가장 정리가 어려운 난제이기도 하다. 김 회장은 제조업 경영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내용면에서 보면 금융인으로 불러도 손색없다. 그의 성공과 실패는 후진적이던 국내 금융시스템을 글로벌 스탠다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자극이 됐다.
부실기업을 인수해 정상화시키는 게 김 회장의 장기다. 인수자금 조달은 특기다. 1970~1980년대에는 비교적 기업들이 돈을 빌리기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업공개(IPO)에도 적극적이었다. 우회상장도 활용했다. 자본부담은 최소화하면서 빠른 사업확장이 가능했던 비결이다. 1967년 대우실업 설립 이후 1976년 기획조정실을 만들어 그룹의 모양새를 갖추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늘어난 자산은 또다시 확장을 위한 차입의 발판이 됐다. 대우의 인수합병(M&A)이 시간이 갈수록 대형화된 이유다. 대우의 고도성장기에는 권력과 척을 지지 않는 한 ‘대마불사’가 건재했던 시기다. 김 회장이 내놓은 비장의 카드도 끝까지 M&A였다. 대우그룹이 몰락하기 직전인 1998년 쌍용자동차 인수, 1999년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 빅딜 시도는 마지막 승부수들이었다.
권력도 잘 활용했다. 제주도지사를 지낸 부친이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재직시 교장이었고, 김 회장 본인은 명문인 경기고와 연세대를 졸업했다. 신군부 당시 실세였던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고교 동창이다. 세계경영을 할 때도 신흥국 최고권력층과 쌓은 두터운 인간관계가 바탕이 됐다. 구 공산권의 ‘지하자금’을 마이너스 금리로 유치해 사업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대우의 성장과정을 보면 사모펀드(PE)와 닮았다. 이 때문에 대우가 거대한 투자회사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대우가 유일하게 업계 1위를 하던 업종이 증권업이다. 1981년 내부 M&A로 출범시킨 ㈜대우는 국내 대그룹에 도입된 첫 지주회사 형태다. 지주회사는 투자가 목적이다.
대우의 투자가 승승장구했던 비결을 요약하면 세계의 흐름을 잘 읽은 김 회장의 ‘눈’이다. 1970~1980년대 중동붐을 잘 활용했고, 1980~1990년대 공산권 개방을 기회로 포착했다. 하지만 아니러니하게도 김 회장의 ‘눈’이 총기를 잃으며 대우는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성공의 장점들은 치명적 약점으로 돌변했다.
금융을 잘 활용한 김 회장이었지만, 결정적으로 외환위기 조짐을 읽어내지 못했다. 결국 고금리로 차입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빚으로 연결된 계열사들이 잇따라 무너졌다. 내실보다는 외형중심이던 계열사들을 높은 값을 받고 팔기도 어려웠다. 때마침 대마불사를 비호했던 보수정권도 무너졌다.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계열사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산업계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다. 적어도 글로벌 경쟁력 면에서는 대우가 삼성, 현대, LG에 비해 앞선 부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우 해체가 금융권에 미친 영향이 오히려 더 커보인다.
대우가 발행한 회사채, 이른바 ‘대우채’는 금융권에 메가톤급 폭탄이 됐다. 대우채에 돈을 넣은 금융기관과 개인들은 하루 아침에 투자금을 모두 날리게 됐다. 외환위기 전에는 채권 시가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서울보증보험의 전신인 대한보증과 한국보증이 대우가 발행하는 회사채에 보증을 섰다. 대우채가 부도 나며 두 보증보험사에만 무려 11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외환위기 이후 활성화 된 M&A 시장에서 대우 계열사들은 ‘최대어’들이었고, ‘최고 난제’이기도 했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0년이 지나도 아직도 제 주인을 찾지 못한 계열사들이 적지 않다. 대우 계열사들을 정리하면서 국내 기업금융과 M&A 기법들도 많이 발전했다.
김 회장의 도전도 실패로 끝나고, 대우그룹도 이젠 사라졌다. 하지만 의미없는 도전은 아니었고, 실체없는 소멸도 아니다. 김 회장과 대우의 역사는 기업인에게, 우리 경제사에 소중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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