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는 작품>
고기와 남자 형상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습작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서 출발한 습작
프랜시스 베이컨, 머리VI |
※이 기사에는 DC코믹스의 등장인물 '조커'를 다룬 영화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위급(Urgent).'
빅키 베일은 누군가 색연필로 휘갈기듯 쓴 글을 읽었다. 장난 같은 이 글은 그녀 앞 수상한 선물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베일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포장을 풀었다. 안에 있는 건 깜짝 반지도, 초콜릿도 아닌…. 방독면이었다. '당장 쓰시오(Put this on right now)!'라는 경고 문구와 함께였다. 치이익. 때마침 베일이 있는 미술관 안 환풍구에서 보라색 연기가 뿜어져나왔다. 독가스 테러였다. 매캐한 연기에 주변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그녀는 서둘러 방독면을 쥐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영화 배트맨(팀 버튼 작·1990) 스틸컷 |
"여러분, 상상의 나래를 폅시다!"
갑자기 미술관 문이 열렸다. 한 남성이 소리쳤다. 그와 춤추듯 발맞춰 들어온 선글라스 군단이 환호했다. 보라색 베레모와 정장, 오렌지색 와이셔츠, 기괴하게 찢어진 입과 천진난만한 웃음소리. 한가운데 선 남성 이름은 잭 네이피어였다. 통칭 조커였다. 조커는 쥐 죽은 듯 조용해진 미술관을 마음껏 거닐었다. 리듬을 타며 그림과 조각상들 사이에서 핑그르르 돌았다. 선글라스맨이 든 스피커에서 들리는 프린스의 경쾌한 '파티맨(Partyman)'에 맞춰 조각상을 깨뜨렸다. 이게 시작이었다. 이들은 렘브란트 반 레인 초상화에 손바닥 자국을 찍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그림에 페인트를 끼얹었다. 에드가 드가 작품 속 발레리나에게 마구잡이로 모자를 씌웠다. 명화에 망설임 없이 '조커 왔다 감(Joker was here)' 등 낙서도 자행했다. 파괴와 훼손이 이어졌다. 명백한 반달리즘(vandalism·문화유산이나 예술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 현장이었다. "어이, 잠깐." 그렇게 마음껏 깨부수던 조커가 그림 한 점 앞에 멈춰섰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부하가 그 그림에 흉기를 대는 순간 "이건 마음에 드니 가만히 둬!"라며 지팡이로 제지했다.
영화 배트맨(팀 버튼 작·1990) 일부 캡처 |
그런 다음, 조커는 고개를 돌렸다.
미술관 한편에서 방독면을 쓰고 있는 베일을 보고 미소 지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그녀를 만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이건 당신 거야?" 조커가 그녀의 작품집을 들고 물었다. "내 작품을 보려고 한 사람을 만나러 왔어요." 베일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커는 그 자리에서 종군 사진기자 경험이 있는 베일의 여러 작품을 품평했다. "이건 쓰레기(작품), 이것도 쓰레기, 저것도 쓰레기…! 오, 이건 나쁘지 않군." 조커의 눈이 또 반짝였다. 사체가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이었다. "해골과 몸뚱이!" 조커가 킬킬댔다. 입술을 죽 찢으며 흡족한 표정을 띄웠다. 직전에 '살려둔' 그림을 다시 떠올리는 듯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고기와 남자 형상 [시카고 미술관] |
더 느긋한 상황이었다면, 조커는 베일의 팔을 이끌고 아까 전 그 그림 앞에 섰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이걸 참고해봐. 정말 죽여주지 않아?" 영화 배트맨의 악당 조커(잭 니콜슨)가 이날 유일하게 반한 작품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기와 남자 형상'이었다. 두 눈 푹 팬 남성이 고문을 받는 듯 비명을 내지른다. 양옆에는 도살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고깃덩어리가 대롱대롱 달려있다. 순도 100% 악을 품은 '범죄계 광(狂)태자의 마음에 쏙 들 만큼 악몽 같은 작품이었다. 베이컨은 누구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조커만큼이나 기괴한, 조커만큼이나 끔찍한 그림을 그렸을까.
레지널드 그레이,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화 |
짐작할 수 있듯, 베이컨 또한 보통의 삶을 살지 않은 예술가였다.
특히 베이컨의 어린 시절은 여러모로 파란만장했다. 그는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했다. 다섯 남매 중 둘째였다. 아버지 에디는 육군 대위이자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퇴역 후에는 경주마 조련으로 돈벌이를 했다. 훈장을 달 만큼 군 생활을 잘했던 그는 여전히 스스로를 대위로 칭했다. 온 가족을 후임병처럼 통제했다. 베이컨은 그런 '에디 대위'의 관심 병사였다. 베이컨은 허약했다. 두통과 천식을 달고 살았다. 어쩌다 조랑말을 타고나면 틀림없이 몸져누웠다. 아버지는 약골 베이컨을 강하게 키우려고 했다. 그래서 기상천외한 일을 했다. 동료 마부에게 베이컨을 맡겼다. 마부에게 건넨 건 빳빳한 채찍이었다.
영화 다크 나이트(크리스토퍼 놀란 작·2008) 스틸컷 |
"내 아들을 때리시오."
그렇게 그가 보는 앞에서 베이컨을 채찍질하게 시켰다. "아파요! 아버지" 베이컨은 매서운 몰아침에 절규했다. "참아라. 모든 건 너를 남자답게 만들기 위한 훈련이야." 그가 들을 수 있는 건 이 말뿐이었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어, 그런데… 조금 더, 조금만 더. 교육이랍시고 매번 얻어맞은 베이컨에게 특이한 변화가 생겼다. 분명 아프고 쓰린데,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것은 황홀함에 가까웠다. 머리부터 맞으면 '띵'해져 통증을 못 느끼니 아쉽다고 말하는 조커(히스 레저)처럼, 베이컨은 통증 자체를 즐기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는 그놈의 훈련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끝내 마부와 부적절한 관계도 맺고 말았다. 아버지의 첫 번째 실수였다. 베이컨은 고통을 견디는 '상남자'가 되지 못했다. 외려 고통을 즐기는 성선호장애(성도착증)에 발 디뎠다.
영화 조커(토드 필립스 작·2019) 스틸컷 |
보수적인 군인, 종교의 가르침을 헌법처럼 여긴 신자였던 아버지에게는 환장할 일이었다.
아버지는 베이컨을 첼트넘에 있는 기숙사 학교로 내보냈다. 하지만 베이컨은 거기서 한 소년과 또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었다. 교내가 발칵 뒤집혔다. 베이컨은 사실상 퇴학 처분을 받았다. 아버지의 두 번째 실수였다. 규율이 지배하는 단체 생활 경험은커녕, 베이컨은 자기 취향만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온 베이컨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얼마 안 돼 또 일이 터졌다. "뭐하는 짓이야!" 아버지는 기습전에 나선 군인처럼 방문을 홱 열었다. "아, 아버지. 그게…." 어머니 속옷을 몰래 입고 있던 베이컨은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아버지는 베이컨의 행태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베이컨을 흠씬 두들겨 팼다. 동네 부랑자 대하듯 내쫓았다. 그가 아직 10대 때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아버지의 세 번째이자 결정적 실수로 남게 된다. 울타리에서 벗어난 베이컨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만다. 조커(호아킨 피닉스)가 어머니 곁을 떠나면서 각성했듯.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
1927년, 멍투성이의 베이컨이 간 곳은 독일 베를린이었다.
퇴폐미를 떠받든 유럽 데카당스(Décadence) 문화의 중심지였다. 베이컨은 위축도 잠시, 물 만난 고기처럼 세기말 분위기에 심취했다. 더 마음껏, 더 진득하게 나돌았다. 아버지가 없으니 제동도 없었다. 많은 이들에게 용돈을 받았다. 도박으로 마음껏 탕진했다. 그런 베이컨은 곧 거처를 옮겼다. 이번에는 프랑스 파리였다. 그는 또 방탕하게 생활했다. 그가 거쳐간 직업은 파출부, 여성복 가게 점원 등이었다. 많은 순간에는 건달이자 백수였다. 그렇게 평생 살다가 가족도, 묘지도 없이 죽을 것 같았다. 베이컨은 그쯤 우연히 한 전시회를 찾았다.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 있었다. 베이컨은 그의 자유분방한 작품을 보고 해방감에 젖었다. 눈에서는 눈물, 입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살면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혼돈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베이컨에게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도 예술을 해야겠어. 그는 결심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Blood on The Floor |
1929년, 베이컨은 영국 런던으로 왔다.
그가 어릴 적 잠시 살았던 곳이었다. 그에게는 제2의 고향 같은 도시였다. 베이컨은 당장 붓을 들지는 못했다. 무슨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에 뭘 그려야하는지, 어떻게 그려야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베이컨은 일단 디자인 쪽에서 일했다. 주로 하는 일은 인테리어였다. 수입은 그저 그랬다. 그래도 도면 설계부터 러그 제작, 가구 조립 등을 하며 창작의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베이컨은 그사이 뒷골목의 영역에 계속 손을 내밀었다. 첫째는 돈, 둘째는 쾌락을 위해서였다. 당시 베이컨은 그의 늙은 보모와 함께 생활했다. 둘은 작정하고 불법 룰렛 파티를 열었다. 버는 돈 대부분은 다음 파티를 위한 장식 준비에 쓰였지만, 보모가 끈질기게 팁을 받아내는 덕에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그는 주로 한 곳뿐인 화장실 문 앞에서 사람들을 닦달해 팁을 얻었다). 베이컨은 소위 '애인 대행' 아르바이트도 했다. 가명 라이트풋으로 일간지 타임스(The Times)에 '신사의 동반자(gentleman’s companion)'라는 광고를 걸었다. 보모가 베이컨의 동반자를 직접 골랐다. 그 기준은 당연히 재산이었다. 이렇듯, 베이컨의 삶은 여전히 혼돈과 무질서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Study for Portrait II |
베이컨은 그렇게 번 돈으로 넉넉하지 않게나마 화구를 살 수 있었다.
베이컨은 천천히 배우고 꾸준히 그렸다. 도박장에 가고, 아슬아슬한 쾌락을 찾고, 천식 탓에 쉬면서도 끝내 관두지는 않았다. 베이컨이 베껴 그린 건 피카소의 그림이었다. 종종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림도 참고했다. 베이컨이 그리고 싶은 건 분명했다. 통증과 불안, 우울과 분노 등 자기를 평생 따라다닌 그 감정들이었다. 비교적 늦게 시작해서인지 실력이 빨리 늘지는 않았다. 머릿속에선 뒷골목의 온갖 잔상들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베이컨은 10여년간 거의 습작만 그렸다. 자기가 뭘 어떻게 그려야 오장육부가 편할지를 계속 고민했다. 그사이 약간 주목을 받는 일도 있었지만, 그의 결과물 대부분은 혹평에 시달렸다. 베이컨은 때때로 술에 취해 울부짖었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때는 흉기를 들고 자기 캔버스를 마구 그었다. 초조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랬을 뿐이었다. 하도 찢고 밟고 구긴 탓에 그의 습작기 작품은 현재 겨우 10여점만 남아있다.
에드바르 뭉크, 절규 |
영화 '전함 포템킨(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작·1925) 스틸컷. |
그것은 끔찍한 살육 현장이었다.
세상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더는 똑같은 바보짓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상의 기억력은 고작 20년이었다. 1939년, 기어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베이컨은 군 복무를 할 수 없었다. 지독한 기침 탓이었다. 베이컨은 그런데도 박박 우겨 공습 감시단에 자원했다. 하지만 폭약 연기가 가득한 런던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군복을 벗었다. 베이컨은 뒤를 돌아봤다. 온 나라가 신음하고 있었다. 온 국민이 절규하고 있었다. 베이컨은 고통에 응어리진 그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통증에 얼룩진 자기 삶이 쑥 끼어들었다. 그는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베이컨은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를 떠올렸다. 당장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를 듯한 기괴한 얼굴을 되새겼다. 베이컨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도 생각했다. 총에 맞은 여성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컷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그는 붓을 쥐었다. 이제야 자기가 뭘 그려야 할지를 깨달았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 책형(磔刑)을 위한 세 습작 |
그림은 강한 인상을 준다.
속이 울렁거릴 만큼 깊고 강렬하다. 기괴한 형상들이 캔버스에 자리 잡고 있다. 괴물 같은 회색 몸뚱이들은 오렌지색 공간에서 서로 다른 자세를 취한다. 목은 길쭉하고, 눈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팔다리 또한 차라리 없는 게 나을 듯하다. 인간의 형상인지, 동물의 일부인지, 상상 속 괴물인지 도통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회색 덩어리들이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의 형식은 세 폭 제단화다. 주로 종교화에서 쓰는 방식이다. 보는 이는 우짖는 괴물들을 보며 종교화에서나 느낄 법한 경건함 내지 엄숙함에 젖을 수 있었다. 베이컨은 총칼과 대포, 전차가 모든 것을 휩쓸고 있을 때 이 그림을 완성했다. 제목은 '십자가 책형(磔刑)을 위한 세 습작'이었다. 베이컨은 훗날 이 작품을 놓고 화폭에서 인간의 슬픔, 공포, 분노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헨리에타 모라에스의 초상화 |
현대미술 영역에서 베이컨은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렵다.
입체파로 넣자니 대상의 해체·재조합에 몰두한 게 아니었다. 표현주의의 범주로 보기에는 너무 튀었다. 초현실주의로 간주하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어둡고 기괴했다. 그렇다고 인물화(그의 회색 덩어리는 아무리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풍경화, 정물화 등 한 장르의 대가라고 칭하기도 힘들었다. 따지자면 베이컨은 외딴섬이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에 베이컨은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자화상을 위한 세 가지 연구 [개인소장] |
현대미술로 넘어가기 전 미술계는 하나의 대장주를 향해 행진했다.
다 쓴 탄창 바꿔 끼우듯, 하나의 옛 사조는 하나의 새로운 사조로 대체되는 경향이 역력했다. 가령 르네상스는 바로크로 바뀌었다. 바로크는 로코코, 로코코는 신(新)고전주의, 신고전주의는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사실주의 등으로 전자는 후자에게 바통을 건넸다. 현대미술로 넘어오면 그런 모습이 점점 옅어진다. 새로운 사조, 새로운 화풍, 새로운 장르가 우후죽순 탄생했다. 즉, 베이컨을 필두로 수많은 외딴섬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선배도 뚜렷하지 않고 후배도 분명하지 않은 예술가, 자기만의 제국을 짓고 일구고 부수기를 반복하는 예술가가 고개를 들었다. 동양식으로 보면 춘추전국시대의 재림이었다. 서양식으로 보면 황제 한 명에서 양두(兩頭)정치, 사두(四頭)정치 등 주류가 계속 갈라져 서로 목소리를 내는 로마제국의 재현 같았다. 베이컨은 그런 현대미술의 특징을 앞장서서 설파했다. 그가 현대미술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이유다.
1945년, 베이컨은 런던의 르 페브르 화랑에서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을 공개했다.
사람들은 전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괴상한 그림에 또 충격을 받았다. 전시는 대박이었다. 베이컨은 드디어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이제 어딜 가도 주목받는 화가였다. 심오함을 좋아하는 영국 특유의 성향에 딱 맞는 괴물이 등장했다. 명성은 끝없이 높아졌다. 더는 다 쓴 캔버스 뒷면에 그림을 안 그려도 될 만큼 돈도 원 없이 벌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서 출발한 습작 |
디에고 벨라스케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 |
베이컨은 변함없이 인간의 통증에 천착(穿鑿)했다.
자신의 태생적 불행, 전쟁이 낳은 파괴와 허무, '살아간다'는 말보다는 사실 '죽어간다'는 말이 어울리는 인간의 숙명에 풍덩 빠져 헤엄쳤다.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러다 지치고, 그러면서도 갈망하는 인간의 굴레를 탐구했다. 1950년, 베이컨은 극도의 공포를 안기는 교황 초상화를 만들었다. 교황은 밀실에 갇혀 고문 의자에 앉은 듯 비명을 뿜어내고 있다. 눈도, 입도, 그를 감싼 모든 피부도 찢어질 듯하다. 굵고 진한 선은 교황에게 빨려 들어가는 온 세상 모든 고통인 듯도 하다. 베이컨의 그림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에서 출발한 습작'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참고해 완성했다. 이 그림은 또 논쟁을 불렀다. 종교계 최고 권력자를 고통의 화신처럼 그렸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었다. 베이컨은 종교를 비하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가장 경건하고 권위 있는 '신의 대리인'도 고통에는 무방비하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너도, 나도 다 고기야." 베이컨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정육점에 가면 언제나 놀라곤 해. 왜 내가 아니고 저 동물들이 저기에 걸려있는지." 이런 말도 했다. 너처럼 고귀한 인간이든, 나처럼 비루한 인간이든 종국에는 다 고기가 된다는 말이었다. 조커가 그렇게나 마음에 들어한 고깃덩어리 그림(고기와 남자 형상) 또한 이런 생각에서 그린 것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Study from Innocent X |
프랜시스 베이컨, 자화상 |
"우리는 산다. 그리고 죽는다. 오직 그뿐."
베이컨은 자기가 한 말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무엇을 위해 살지, 어떻게 삶을 가꿀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인간은 흙과 고깃덩어리로 돌아간다. 굳이 고귀하게 살 일도, 우아하게 살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베이컨은 막 살았다. 눈치 보지 않고, 주저하지도 않았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 형벌을 위한 세 가지 연구 시리즈 |
무엇보다 베이컨은 그의 남다른 성적 취향을 평생 부정하지 않았다.
베이컨은 외모가 괜찮았다. 턱은 좀 처졌지만 잘생긴 편이었다. 그는 애인도 많았고, 뮤즈도 많았다. 당연히 다 남자였다. 베이컨의 공식적인 첫 애인은 1929년에 만난 에릭 홀이었다. 베이컨은 돈 없던 시절 그의 소일거리 '신사의 동반자'를 통해 홀을 처음 알았다. 성공한 사업가면서 정치가였던 홀은 베이컨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금전적으로, 심리적으로 큰 힘을 줬다. 미식가이기도 한 홀은 베이컨에게 고급 레스토랑과 와인의 세계도 소개했다. 두 사람은 15년가량을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돌연 헤어졌다. 왜 갈라졌는지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베이컨은 1952년에 전직 전투기 조종사 피터 레이시와 사귀었다. 레이시는 멋진 외모와 세련된 패션 감각을 가진 영국 신사였다. 하지만 그에게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술만 마시면 돌아버린다는 것이었다. 레이시는 술에 취해 베이컨의 그림을 찢거나 부쉈다. 둘의 관계는 레이시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끝장났다. 레이시는 1962년에 사망했다. 베이컨의 첫 번째 회고전이 열리기 전날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인물 연구 |
그리고 2년 후 베이컨은 전쟁 같은 사랑과 또 마주했다.
"거기 누구 있소?" 베이컨은 자기 집에서 정체 모를 누군가가 살금살금 걷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나오시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베이컨의 회유에 어린 남성이 쭈뼛쭈뼛 등장했다. 베이컨은 흠칫했다. 우수에 젖은 눈, 무방비하게 벌어진 입술을 응시했다. "당신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당신이 원하는 걸 내가 줄 수도 있겠소." 베이컨은 홀린 듯 말했다. 그는 이 좀도둑에 어이없이 반했다. 교통사고 당하듯, 예고 없이 푹 빠졌다. 그의 이름은 조지 다이어였다. 런던 빈민가 출신의 미남이었다. 거친 외면 속에 어린아이 같은 내면을 숨긴 사람이었다. 다이어는 베이컨과 뜻이 통했다. 둘은 곧 뜨거운 관계로 발전했다. 다이어는 베이컨의 그림에 수차례 등장할 만큼 특별한 존재로 군림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다이어는 베이컨 이상으로 불안정했다. 베이컨이 약간 차갑게만 대해도 깊이 절망했다. 더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훌쩍였다. 베이컨은 그런 다이어에게 질렸다. 베이컨은 대놓고 바람을 피웠다. 다이어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베이컨이 자기를 무시하고 깔본다며 좌절했다. 결국 다이어는 죽었다. 화장실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1971년 10월, 베이컨의 또 다른 회고전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말하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 |
프랜시스 베이컨, 조지 다이어의 두상 연구 |
연인의 죽음은 벌써 두 번째였다.
베이컨은 애써 담담해했다. 하지만 충격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는 다이어가 죽고서도 그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낫을 든 사신이 튀어나올 듯한, 피비린내가 폴폴 풍길 것 같은 작품을 찍어냈다. 통증, 고통, 분노, 공포, 그리고 죽음…. "너도, 나도 다 고기야. 그냥 다 고깃덩어리야." 베이컨은 여러 감정을 곱씹었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자화상 |
프랜시스 베이컨 |
조커와 베이컨 사이에는 뜻밖의 공통점도 있다.
둘 다 트럼프 카드 '조커'에 친숙했다는 것이었다. 조커는 이를 늘 몸에 품고 다녔고, 베이컨은 수시로 이 카드를 쥔 채 씩 웃었다. 베이컨은 여러 사람과의 문란한 생활 중에서도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았다. 도박장이었다. 베이컨은 카지노로 유명한 모나코의 몬테카를로에서 한때 죽치고 살았다. 해도 뜨기 전에 카지노 입구장에 와선 줄을 서고 기다렸다. "도박은 선정적이고, 연극적이고, 꽉 짜여있고, 숨 막히는 면이 있어 눈을 뗄 수 없어."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도박의 엄청난 매력을 알지 못할 거야. 돈이 정말 필요할 때, 그 돈을 도박으로 따낸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말이야." 논란 여지가 상당한, 이런 예찬도 스스럼없이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존 에드워즈 초상화를 위한 세 개의 습작 |
베이컨이 도박에 빠진 이유는 간결했다.
이 또한 '인간은 고기'라는 그의 철학이 이끈 것이었다. 그가 볼 때 어차피 삶은 운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진리도 깨달았다. 베이컨은 이미 요람 때부터 인생이란 도박장에 입장한 것으로 생각했다. 삶이나, 전쟁이나, 카지노나 다 그게 그거였다. 우연과 선택이 빚어내는 결과투성이였다. 이미 수십 년째 거대한 도박(인생)을 하는 상황에서 자잘한 도박(카지노)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Head II |
사실 베이컨의 삶이 늘 이런 식이었다.
베이컨은 기괴한 그림에 중독됐다. 통증, 관계, 도박에도 중독됐다. 그런 그가 가장 중독된 건 불안과 위험이었다. 그는 불안정한 상태를 사랑했다. 이어지는 비극에 손을 내밀었다. 그는 런던과 파리, 스페인과 모로코 등 한곳에 정착하는 법이 없었다. 돈도 모으지 않았다. 술집과 도박장, 뒷골목에 모조리 썼다. 판돈을 다 따간 도박꾼을 위해 샴페인을 땄다. "나한테는 이게 꽤 많아. 이건 그중 일부인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런 말을 하며 동료와 후배 화가에게 용돈도 듬뿍 줬다. 영국 예술계 인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 영예인 왕립 아카데미 회원은 거부했다. 기사 작위도 받지 않았다. 베이컨은 이렇게 거절했다. "그런 명예를 받으면 늙어 보여서 싫어." 베이컨의 전기 작가였던 안나 마리아 빌란트는 그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썼다. 동료 화가인 브라이언 클라크는 '철저한 불량배'라고 표현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
1992년 4월, 베이컨은 갑자기 심각한 천식 발작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새로 사귄 애인과 함께 스페인 마드리드에 머물고 있었다. 이번 발작은 심상치 않았다. 마침 폐렴을 앓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베이컨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엿새 후 사망했다. 심장마비였다. 나이는 82세였다. 베이컨은 삶에 큰 미련이 없었다. 유명세를 즐기지도 않았다. "내가 믿는 건 말이야. 죽을 만큼의 고통은 사람을…. 광(狂)하게 만든다는 거야." 조커(히스 레저)의 말처럼, 베이컨은 죽을 만큼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내며 이를 매번 미친 예술혼으로 승화하곤 했다. "내가 죽으면 나를 비닐봉지에 넣어 시궁창에 던져버려." 이건 베이컨의 말이었다. 그는 그렇게 끝까지 고깃덩어리의 위치를 고수했다.
〈참고자료〉
서배스천 스미, 관계의 미술사, 앵글북스
마틴 게이퍼드, 현대 미술의 이단자들, 을유문화사
무서운 그림, 나카노 교코, 세미콜론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 “벌거벗은 女로 우릴 조롱” 욕이란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최초의 모더니스트(모더니즘①) (2023. 6. 24.)
2)“11살 연하女와 비밀연애, 자식도 낳았다고?”…10년 숨겼다 ‘들통’[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현대미술 창시자(모더니즘②) (2023. 7. 1.)
3)“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입체파) (2023. 5. 20.)
4)“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레디메이드·개념미술) (2023. 6. 10.)
5)“외간여성과 시속 120km 광란의 음주질주” 즉사한 男정체 보니[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미국의 신화(액션페인팅) (2023. 7. 15.)
6)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추상표현주의) (2023. 6. 17.)
7)“관음男-노출女가 만났네요” 조롱…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후암동 미술관-살바도르 달리 편] - 위대한 쇼맨(초현실주의) (2023. 7. 8.)
8)“난 고깃덩어리, 죽으면 시궁창에 던져버려” 폭탄발언…그는 ‘인간중독’이었다[후암동 미술관-프랜시스 베이컨 편] 고통의 화가(외딴섬) (2023. 7. 29.)
9)“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팝아트) (2023. 6. 3.)
10)“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신표현주의) (2023.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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