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머니룩을 비롯한 미국 상류층 라이프를 보여주는 AI 인플루언서. [@feli.airt 인스타그램] |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돈은 떠들지만 부는 속삭인다” (Money talks, wealth whispers).
아메리칸 드림을 외치던 미국인들이 일명 ‘찐부자’ 패션으로 불리는 ‘올드 머니(Old Money)’ 룩에 열광하고 있다. 자기 세대에 자수성가로 쌓은 ‘뉴 머니(New Money)’가 아닌, 윗세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가진 근본있는 금수저 집안 자제들의 스타일이라고 한다.
어쩌다 부자들의 급까지 나뉘기 시작한걸까. 땀 흘려 번 돈보다 불로소득에 열광하는 심리, 아니꼽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올드머니 패션의 뒷 이야기, 이번엔 삐딱하게 해부해보자.
올드머니룩을 비롯한 미국 상류층 라이프를 보여주는 AI 인플루언서. [@feli.airt 인스타그램] |
올드머니룩이 궁금하다면 30만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 ‘펠리(@feli.airt)’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유럽 남부 해안선을 순항하는 요트 위에서 태닝한 피부, 풍성하게 흩날리는 금발의 머리칼, 말 위에 올라탄 꼿꼿한 자세까지. 인공지능(AI)으로 구현한 버츄얼 인플루언서 펠리는 ‘올드 머니’를 선망하는 이들을 위한 판타지로 인스타그램 피드를 채운다.
펠리가 보여준 올드머니 룩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로고가 안 보여 어느 브랜드 옷을 입었는지 쉽사리 알기 어렵다. 대놓고 ‘나 명품이요’ 과시하는 로고 플레이는 졸부 티를 벗지 못한 스타일이라는 이유로 지양한다.
둘째, 무채색·뉴트럴톤 색감의 깔끔한 디자인에 캐시미어·실크 등 고급 소재로 은은한 ‘부티’를 뿜어낸다.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함은 오히려 독이다.
셋째, 부의 상징인 주얼리 착용도 절제한다. 주로 상아빛의 진주 목걸이, 볼드한 골드 악세서리, 또는 다이아몬드 등 아이템 가운데 한 두가지 정도만 곁들여야 우아하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데스트리’ 가방을 들고, 브로치 하나만 달아 완성한 하객룩이 대표적이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왼쪽). 미국 상위 1%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HBO 드라마 ‘석세션’(중앙). 넷플릭스 드라마 ‘셀러브리티’에서 타고난 금수저 역할을 맡은 배우 이청아. 5선 국회의원의 딸이자 문화재단 이사장, 재벌 법무법인 그룹의 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뉴시스] [HBO] [이청아 인스타그램] |
올드머니룩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눈엔 이보다 우아하고, 세련되며, 합리적인 소비 방식도 없다. 좋은 소재의 클래식 한 디자인 제품을 구입해 오랫동안 두고두고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유행따라 달라지는 패스트 패션의 대척점에서 합리적이고 지속가능한 소비를 지향한다는 주장이다.
다만, 이같은 기대는 허상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무리 베이직해 보이는 아이템이라도 유행에 따라 실루엣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 한 업계 관계자는 “흰 티라고 다 같은 흰 티셔츠냐”며 “오래 입을테니 비싸도 된다고 합리화하기 전에 한번 더 고민해보라. 실크와 캐시미어 등 천연소재는 관리와 세탁도 까다롭다”고 조언했다.
올드머니룩의 유행이 더 비싸고 희소한 브랜드를 향한 집착을 부추길 수 있다는 비관도 고개를 든다. 대중들 다수가 알게 되면 매력이 반감되는 게 ‘알 사람만 아는’ 조용한 럭셔리의 숙명인 만큼, 더 희소하고 더 비싼 브랜드를 향한 일반 소비자의 과소비를 부추길 수 있다는 관측이다.
미국 상위 1%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HBO 드라마 ‘석세션’. 브루넬노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의 올드머니 스타일을 선보였다. 브리오니(Brioni), 까날리(Canali), 델보(Delvaux), 보디(BODE), 카이트(Khaite) 등 스텔스 럭셔리(상표가 눈에 잘 띄지 않아 드러나지 않는 명품)는 대표적 올드머니 브랜드로 꼽힌다. [HBO] |
“몇몇 부자들은 이미 ‘아스페시’(ASPESI) 같은 더더욱 생소한 브랜드 소비를 늘리며 그들만의 성벽을 쌓는 중이다.”
타임스 럭셔리 매거진의 편집장 출신인 제임스 콜라드(James Collard)는 올드머니룩 유행이 이미 부자들의 소비 행태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경제적 수준인 사람들만 알아볼 수 있는 제품을 선호하는 새로운 유형의 소비자”를 자처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대표적인 올드머니룩으로 거론되는 브랜드 다수는 이미 발렌티노(Valentino), 미우미우(Miu Miu), 발렌시아가(Balenciaga) 등 유행의 최전선에 서 있는 브랜드와 달리 대중에겐 이름부터 생소하다. 미국 상위 1% 가문의 이야기를 다룬 HBO 드라마 ‘석세션’ 덕에 알려진 브루넬노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넷플릭스 시리즈 ‘더글로리’에서 상류층 하도영의 대사인 “제냐, 베르사체 방금 다 망했네”로 화제를 모았던 Zegna(제냐) 등이 대표적이다.
[X(옛 트위터)] |
바다 건너 흘러들어 온 올드머니룩을 향한 한국 젊은 층의 시선은 다소 싸늘하다. 대대로 물려받은 불로소득을 의미하는 올드머니는 젠지(Gen Z) 세대에겐 어떤 의미일까. X(옛 트위터)에 올라온 촌철살인을 들여다 봤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착취를 통해 쌓은 부’라는 비판이다. 제3세계 식민지 국가, 노예 계급, 노동자 등을 착취하며 쌓아온 백인 중심 엘리트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다. AI 인플루언서 펠리를 비롯해 올드머니룩 화보마다 등장하는 내리깐 시선의 백인 모델들이 이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
졸지에 요란한 럭셔리란 평을 듣게 된 뉴머니 스타일을 재평가 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IT·가상화폐 등 새로운 업종에서 자수성가한 뉴머니 계층이 로고 플레이 스타일을 선호한 것은 노력의 대가에 대한 자부심과 떳떳함 덕분 아니겠냐는 해석이다. 올드머니의 불로소득에 과도한 판타지를 부여하는 유행은 계급고착화 시대의 열패감일 뿐이라는 지적이기도 하다.
김대호 MBC 아나운서가 '나혼자 산다'에 출연한 모습. 본인 소유 주택에 설치한 간이 수영장에 참외를 띄운 뒤 씻지않고 그대로 깨물어 먹는 모습. [MBC 유튜브] |
올드머니 판타지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동안, 한국 사회를 웃음짓게 한 건 덱스·김대호·기안84 같은 ‘날 것’ 그대로의 자수성가형 캐릭터다.
이들은 모두 올드머니 판타지의 대척점에 서 있다. 연예대상 후보까지 거론되는 기안84는 수질이 걱정되는 인도 갠지스 강에 망설임 없이 입수한다. 예능 블루칩으로 떠오른 덱스는 당장 청년 전세사기 피해자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나혼자산다’ 출연으로 화제로 모은 김대호 MBC아나운서는 부모님과 외할머니의 돈을 빌려 어렵사리 구입한 2억원대 홍제동 주택에서 ‘제 멋’ 대로 산다. 이들이 어떤 집안 자제이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이들의 어려웠던 시절 고생담을 향한 응원과 앞으로 펼쳐질 나날에 대한 기대감만 있을 뿐이다.
현대인의 하루는 유행을 떠먹여주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한번 클릭한 제품은 살 때까지 따라다니게 만드는 쿠키 광고로 채워져 있다. 이쯤되면 진정한 판타지는 요란한 소음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마이웨이’ 라이프가 아닐까. 우리가 선망하는 건 ‘찐부자’ 판타지가 아닌, 손에 잡히는 진짜 행복일지도 모른다.
kacew@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