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 대웅전 앞 느티나무 |
불교의 원리는 매우 단순하고 쉽다고 하는데, 어렵게 느껴진다. 해석이 난해하고 생소한 용어가 많다. 함축된 의미까지 파악하기 어려운 철학적이고 경전 종류도 많아 접근이 쉽지 않다. 일견 신비감을 줄 수 있지만 대중적 접근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해 보인다.
불교의 원리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삼법인(三法印)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일컫는데, 석가는 세상 모든 것은 ‘괴로움(苦)’이라 했다. 석가가 제자들에게 최초로 설법하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원리(四聖諦) ‘고(苦)·집(集)·멸(滅)·도(道)’에 대해 얘기했다. 그 첫째는 ‘삶은 원래 괴로운 것’이라는 고(苦)로부터 출발해 8고(苦)를 논했다. 희노애락의 모든 요소는 괴로움에 속한다고 해 ‘집착을 놓으면 집착이 사라진다’고 한 것이다.
일전에 보문사에 이어 강화도를 두 번째 방문하면서 ‘세상의 모든 것은 괴로움’(일체개고, 一切皆苦)이라는 불교적 용어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한국에서 네 번째로 큰 섬 강화도는 한강의 관문으로서 황해도 개풍군, 연백군 등과 강을 사이로 북한과 접해있다.
전등사 전경 |
백제와 고구려의 주요 격전지였고, 고려 때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39년간 임시수도의 역할도 했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청나라 침입, 프랑스가 쳐들어온 병인양요, 미국이 침입한 신미양요, 일본이 들이닥친 운유호 사건 등 피와 눈물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고 지금도 남북 대치의 최전선에 있다. 강화도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마니산(469m) 정상엔 참성단(塹星壇)을 둬 하늘님에 제사를 지냈건만 그 아픔의 역사를 막을 순 없었다.
통한의 역사를 얘기하듯 전등사(傳燈寺)는 산성(山城) 안에 갇혀 있고, 팔만대장경을 보관했던 선원사는 넓은 절터만 남아있다. 서울 한강과 군사 분계선을 넘어온 임진강, 개성의 예성강이 합류해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연미정(燕尾亭)은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등사 종루(왼쪽)와 대조루(오른쪽) |
전등사는 인천 강화도 남부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승려 아도화상이 당시 백제 땅이었던 강화도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이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가 처음 전해지고 375년 고구려에 성문사와 이불란사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전등사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찰이 됐다.
고려 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이었는데, 원나라 속국 시절 충렬왕의 왕비였다가 원나라 칸의 딸 제국대장 공주에게 밀려 둘째 비로 강등되고 수모를 겪은 정화 궁주가 대장경과 옥으로 만든 법등을 절에 기증하면서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을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라는 뜻의 전등사(傳燈寺)로 바뀌었다.
전등사 전경 |
1605년과 1614년 화재로 타버렸으나 1621년 재건해 오늘의 모습이 됐다. 1678년(숙종 4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돼 보호를 받았으나, 1909년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는 잃고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됐다.
보수 공사 중인 대웅전 |
1866년 병인양요 때 산성 외부의 암자와 건물은 프랑스 군의 방화로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되기도 했다. 프랑스 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조선 군 병사들이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서 돌아가기를 빌었던 전등사 대웅전은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에는 또 다른 보물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있고 좌상 위에 지붕의 역할을 하는 닫집은 극락조와 용,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익살스런 모습 등 조각 솜씨가 돋보여 한참을 앉아서 바라보게 된다.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건물 네 모서리 추녀 밑 벌거벗은 사람의 나부상(裸婦像) 조각도 그 속에 담긴 전설과 함께 유명세가 있다.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전등사에는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400여 년 된 약사전도 보물이다. 보물로 지정된 종들 중 유일한 중국 종인 철종(鐵鍾)은 중국 허난성 백암산 숭명사에서 건너온 것으로, 해방 후 인천의 군기창에서 발견돼 전등사로 옮겨왔다. 전등사의 원래 범종은 공출돼 해방 후 주지 스님이 혹시나 해 인천 항구를 뒤지다가 군기창에 버려진 주인 없는 범종을 가져온 것이다.
무설전 |
쇠붙이를 강제 수탈하던 일제강점기 말에 중국에서 반입한 것이 일본 패망 이후 인천에 남았던 것이라 추측된다. 사찰 내 여러 곳이 공사하고 새로 짓고 있어 공사용 칸막이와 기계 소리와 자재 운송 트럭들로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원 전체가 요란하고 부산스럽다.
무설전 강당의 템플스테이 모습 |
담벼락 안으로 쑥 들어가 크기가 가늠이 안 되는 무설전은 갤러리를 겸하고 있는 듯 내부 벽에는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넓은 강당에는 단복을 입은 템플스테이 참가자 10여명이 불교에 대한 공부가 한창이다.
노승나무 |
세발 달린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다는 나지막한 뒷산(정족산 220m)에는 노송 군락지를 비롯해 단풍나무, 엄나무 등 다양한 수목이 울창하게 둘러싸고, 전등사 내부에는 수령 350년, 높이 20m이상의 거목들이 보호수 표지판을 붙이고 있다.
동자승나무 |
대웅전 앞 느티나무나 정족산 진지 앞 팥배나무 등 많은 보호수 중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죽림다원(찻집) 아래쪽에 있는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는 오래된 은행나무다. 노승나무와 동자승나무로 이름 붙여진 두 그루 은행나무엔 불교가 힘들었을 시기를 짐작케 하는 설화가 깃들어 있다.
어느 해 동자승이 노승에게 전하길 전등사에 있는 두 그루 은행나무에서 수확한 은행을 두 배로 늘려서 바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풍년에도 열 가마니 수확인데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내라고 하니, 고심하던 노승은 도술이 뛰어난 인근의 백련사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추송 스님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쌓아두고 은행 열매가 더 열리게 하는 3일 기도를 시작했다. 마지막 사흘째, 기도가 끝나갈 무렵 축원문을 읽는데 그 내용이 “이 은행나무 두 그루가 앞으로 천년만년 영원히 열매를 맺지 않기를 축원하나이다" 였다.
뜻밖의 내용에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해 하는데 축원이 끝나자마자 먹구름이 몰려왔다. 천둥번개와 함께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우수수 떨어졌다. 비바람이 그치고 하늘이 개자 은행나무 쪽을 보니 추송선사와 노승(老僧), 동승(童僧)은 온데간데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후 두 은행나무는 은행을 맺지 않아 진상을 바칠 열매가 없게 되자 관가의 탄압도 없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스님으로 변해왔다고 여기며 은행을 맺지 않는 은행나무들을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부르고 있다.
정족산성 진지터 |
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은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한 봉우리씩 쌓은 성이라고 해 삼랑성(三郎城)이라 한다. 전등사는 삼랑성의 동문과 남문을 통해 진입하며 주차비 명목으로 2000원씩 부담해야 들어갈 수 있다. 필자에겐 차량 내비게이션이 동문 방향을 알려줬다.
양현수 장군 승전비 |
동문 입구에는 템플스테이 숙소가 깔끔하게 자리하고 있다. 동문을 들어가니 프랑스 군과 치열한 혈전 끝에 승리를 거뒀던 양현수 장군 승전비가 있어, 이곳이 병인양요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었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조선 시대에 개성과 한양의 외곽 방어를 위한 중요한 장소였다. 기울어져가는 고려 조정이 가궐(임시궁궐)을 지을 만큼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정족산 사고 |
절 가장 뒷쪽엔 1998년에 복원했다는 ‘정족산 사고’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장사각’과 왕실족보를 보관했던 ‘선원보각’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을 굳게 잠긴 문틈 넘어 확인하며 어렴풋이 역사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전주 사고본 만이 보존됐는데 이를 다시 4부를 등사해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 등지에 보관했으나 호란과 화재 등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다행히 정족산 사고본은 병인양요 때 스님들이 실록을 보호하기 위해 토굴로 옮기는 노력 등으로 살아남아 국보로 지정돼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다.
삼랑성 남문 |
정족산 사고 앞에는 영조가 썼다는 편액이 있는 ‘취향당’도 공사가 한창이다. 사고를 보호할 목적의 군사 주둔지였던 ‘정족산성 진지터’ 등을 들려 전등사를 한 바퀴 돌았더니 ‘종해루’ 현판이 붙은 성곽, 삼랑성 남문 방향으로 나오게 됐다.
매표소에서 동문 가는 길을 물어 큰길까지 나와서 뙤약볕에 아스팔트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확인해 보니 산성쪽 산길을 알려줬으면 거리도 훨씬 짧고 걷기도 편했을 건데, 부실한 안내문을 대신해 주차비 징수원들도 길안내 역할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강화 선원사지 |
팔만대장경을 조각하고 조선 초 합천 해인사로 옮기기 전까지 보관했던 선원사지가 전등사에서 15분 거리에 있어 들렸다. 고려 무신정권 최대의 국가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그 당시의 영광을 들어내는 절터 구역을 구분하는 푯말들만 나부끼고 있었다.
강화전쟁박물관 입구 |
강화도에는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해안가 등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방어시설인 ‘돈대’ 53개가 섬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조선 숙종은 강화도 해안 전역 돌출부에 48개의 돈대를 설치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강화전쟁박물관 등과 함께 있는 강화대교 옆 ‘갑곶돈대’다.
갑곶돈대 내 비석군 |
필자가 도착하니 관람시간이 끝났는지 문이 굳게 닫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탱자나무는 보지 못하고, 담장 넘어 각기 다른 의미를 간직하고 있을 비석군(67개) 만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부터 점령 당했던 갑곶돈대 옆에는 아이러니하게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을 추모하는 갑곶선교성지가 조성돼 있었다.
월곶돈대와 연미정 |
강화도에서 가장 풍광이 좋다는 북쪽의 ‘월곶돈대’ 연미정(燕尾亭)은 ‘돈대 앞 물길이 제비 꼬리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의 정자이다. 북한 땅과 인접한 민통선 안에 있어 해병대원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월곶돈대 외곽으론 경비 초소와 높은 철조망이 가로 막고 성곽 안에는 5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와 연미정이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연미정 |
느티나무 한그루는 태풍 링링으로 꺾여 기둥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강들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철조망에 갇힌 연미정이지만 사방이 확 트여 강화 8경 중 하나라 할 만큼 절경이었다. 특히 달밤의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석양의 풍광도 일품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남북 분단의 경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정묘호란 때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은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월곶돈대에서 바라본 북한 개풍군 |
중종 5년 삼포왜란 때 왜구들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워 왕이 연미정을 하사해 이곳에서 말년을 보낸 황형(1459~1520) 장군의 옛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예성강과 임진강, 한강이 연미정 앞에서 하나가 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해로 흘러가지만 강화도와 전등사를 들려보며 우리 민족의 철조망에 갇힌 역사가 아프게 다가온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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