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외교관 서희,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걸그룹 ‘카라’ 멤버 구하라. 생년월일엔 1000년의 시차가 있지만 한국인의 특질을 발현해 성공을 이끌어낸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당당함과 집요함, 승부근성이다.
서희는 993년, 평북 봉산까지 치고들어 온 거란 적장 소손녕과의 협상에서 절충이 여의치 않자 숙소에 돌아와 호기롭게 드러누워 초반 기세를 잡은 덕에 강동6주를 되돌려 받았다. 이건희 회장은 싸구려 취급 받은 제품을 만들던 회사를 불과 20여년만에 초일류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구하라는 ‘구사인볼트(100m 세계기록 보유자인 우사인볼트+구하라)’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국내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기를 쓰고 달리더니 일본 열도에 신(新) 한류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의 성공은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 뜨겁게 흐르는 ‘지고는 못사는’ 민족적 기질을 대변한다.
체구는 작다. 그러나 주눅들지 않는다. 강대국 틈바구니 속 ‘샌드위치 신세’인 소국이지만 세계를 상대로 정치·외교, 경제, 문화 각 부문에서 ‘승리하는 법’이 한국인의 디옥시리보핵산(DNA)에 각인돼 있다는 점은 줄기차게 입증되고 있다.
자랑스런 상고,고대사를 지나 압록강 이남에 갇힌 이후 일제침략까지 계속된 지난(至難)했던 역사의 상처가 아물 무렵 우리는 서희, 이건희, 구하라 식 성공담을 조금씩 풀어놓을수 있게됐다. 세계가 놀랄만큼 파격적이다.
남들 300년 경험한 산업화를 50년하고도 ‘G20’ 신질서의 주도자가 됐다. 지난 50년 보인 변화는 세계 누구도 따라올수 없다. 2008년 기준으로 1960년에 비해 GDP는 31배, 1인당 GDP는 16배로 성장했다. 산업혁명의 선구자인 영국은 1700년부터 1870년까지 GDP가 9.4배 커졌고, 일본은 1913년 산업화 초기부터 1970년까지 14.1배 상승했다. 고성장 기록이라고 하는 일본 미국 영국의 최전성기에 비해도 한국의 성공 속도는 가히 광속에 가깝다. 스포츠에서도 매번 올림픽 30위권 안팎을 맴돌다 1976년 첫 올림픽 금메달이 나온 이후 매년 19~33개의 메달을 획득해 글로벌 톱10에 가볍게 진입했다. 변방이던 여자축구(U-17)는 여민지의 활약속에 시작한지 10년만에 세계 정상급으로 발돋움했다. 일본은 정신력으로 표현되는 한국식 ‘군대축구’를 끝내 넘지 못했다.
일본에선 ‘이젠 한국을 이길 수 없다’는 ‘한국위협론’이 나오는 지경이다. 한국인의 몹쓸 기질 중 하나였던 모방주의를 얕잡아 봤다는 지적이다.
‘실패학’의 대가로 꼽히는 하타무라 요타로 교수는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한국기업의 약진 배경으로 본다. 그는 “한국기업의 성공 요인은 일본 선행제품의 기능을 철저히 분석해 시장이 요구하는 최적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이 최신 기술·혁신에 매몰돼 있을 때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빠른 추격자) 입장에서 창의성을 덧입힌 게 주효했다는 것이다.
‘카라’ ‘소녀시대’를 주축으로 한 대중문화 분야의 성공스토리도 궤를 같이 한다. 노래의 근간은 미국 팝이지만 한국만의 카리스마 있는 율동을 접목했다.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선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 국경이 무색할정도로 범 아시아적 팬덤현상에 불을 지피고 있다.
식민치하의 세월, 6·25 전쟁 등 한국만의 역사적 시련도 ‘국민정체성’이라는 경쟁력 있는 기질을 한국인에 덧칠했다. 나라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같은 선상에 놓고 목표를 향해 손잡고 줄달음질치게 하는 엔진이다. 가난 탈피의 지름길로 배움을 꼽고, 교육열을 불태운 각 가정의 노력도 세계 초일류 국가 진입을 목전으로 끌어당긴 악셀레이터였다.
그러나 한국이 갈 길은 아직 멀다. 한국인의 DNA가 발현될 여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세계경제포럼(WEF)는 얼마전 한국의 국가경쟁력(2010~2011)을 22위로 평가했다. 뉴질랜드보다는 한 단계 높지만, 싱가포르(3위) 일본(6위) 홍콩(11위) 대만(13위)와 격차는 크게 벌어져 있다. WEF는 한국에 대해 “혁신 분야에서 앞서가는 나라”라면서도 “노동시장의 경직성, 금융계의 후진성, 정부의 비효율성 등이 경쟁력 저하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집단이기주의 등의 고질적 망령을 떨쳐내야 한다는 얘기다.
<홍성원 기자@sw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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